얼마 전 액정보호필름을 교체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시작하려고 보니 '붙이기 전 꼭 동영상 가이드를 숙지하세요!'라는 안내가 보입니다.
그래서 동영상을 봤지요.
다만 좀 건성으로 보았습니다.
왠지 설명 없이도 가볍게 해낼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안 보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은 사실 허상입니다.
꼼꼼하게 가이드 영상을 확인하는 것이 귀찮아서 만들어낸 거짓된 마음입니다.
암튼 거짓으로 무장하고 긴장감 없이 영상을 보고는 곧바로 실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망쳤습니다.
매뉴얼에 나오는 방법대로 차근차근하지 않고 어설피 흉내 낸 탓일 겁니다.
폰이 움직이지 못하게 가이드를 부착하고 시작하라는 말이 귀찮아서 무시했더니 폰이 움직이는 바람에 필름이 반듯하게 붙지 않아서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해 버렸습니다.
친절하게 떼어내는 순서가 1, 2, 3으로 표시되어 있음에도 신중하지 못하게 2번보다 3번을 먼저 떼버렸고 덕분에 지문 인식이 가능할 만큼의 검지 지문을 액정 필름에 남겨버렸습니다.
가운데 부분에 물집처럼 자리 잡은 기포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끝내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필름을 꺼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매뉴얼을 숙지하고 차근차근했으면 좋았을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아까운 필름만 하나 버렸네요.
항상 이런 식입니다.
매뉴얼을 꼼꼼하게 보고 확인하는 수고가 귀찮아서 건성으로 합니다.
(때로는 아예 보지 않습니다. )
덕분에 애꿎은 물건들이 단명하지요.
주인 잘못 만나 평생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제 손은 퍽 어울 할 겁니다.
책을 읽는 것은 좋아하는데 왜 매뉴얼 보는 건 안될까요?
읽었다 한들 정보가 산출되는 과정에서 왜 매번 오작동을 하는 건 왜일까요?
저는 MBTI 잘못이라고 답합니다.
MBTI 가 P로 끝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MBTI 탓을 하면 맘이 좀 편해지거든요)
매사 즉흥적이며 멋대로입니다.
계획은 세우지만 그건 그거고, 행동은 느껴지는 대로 기분 따라 움직입니다.
매뉴얼 대로 행하지 않는 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는 반항심이나 보다 뛰어난 창의적인 발상을 실천해보고 싶은 의지 따위는 전혀 없고요.
그저 읽기 귀찮고 그대로 행하는 꼼꼼함이 부족한 탓입니다.
(메타인지는 발달해서 다행이죠 ㅋ)
분명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따라 했음에도 결과는 늘 새로운 음식이 나오는 것은 같은 맥락입니다.
스스로를 잘 알면서도 쓸데없이 긍정적이라 혹시 이번에는 또 다르지 않을까 희망을 갖고 새로운 일을 벌립니다.
유튜브에서 전국살림자랑 채널을 보게 되었어요.
깔끔하게 정리된 집과 그녀들의 살림 노하우를 보니 있으니 나도 영상 속 군기 잡힌 서랍을 우리집에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습니다.
기어코 지난 주말, 친절하게 전수해 주는 비법들을 전수받아(받은 줄 알고) 서랍장 두 칸을 바닥으로 끄잡아 내렸습니다.
아예 쓰레기봉투를 준비시켜놓고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아웃시켰다.
호기롭게 벌려놓긴 했으나 쓸데없는 객기였다고 후회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영상 속 베테랑들이 쉽다고 말하는 정리 노하우들을 내게는 무용지물이었어요.
들었으나 실전에서 오작동하는 회로 덕에 그저 막막함만 쌓여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보다 못한 남편이 구원투수로 나섰습니다.
버릴 물건을 추리고 같은 물건끼리 모아두더군요.
잠시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점차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이 줄어들고 어느새 수납장 정리를 끝냈습니다.
과정이 무엇이든, 누가했는가가 뭐 중요할까요.
정리를 했으니 되었습니다.
끝내 남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정리된 서랍장/ 암튼 정리됟서 기분 좋음
알고리즘 녀석, 꾀 집요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종이쇼핑백을 활용한 서랍 방법을 보여줍니다.
잡초처럼 객기가 되살아나서는 또 양말서랍장을 뒤집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양말 서랍장은 칸막이가 없어서 남매의 양말이 뒤섞여 아이들이 제 것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침마다 남매는 자신의 양말을 찾기 위해 짝 맞춰둔 양말 커플 여럿을 뿔뿔이 이별시켜 놓습니다.
그렇게 짝 잃은 양말들이 널브러져 서랍 안은 늘 아수라장이었구요.
그래서 꼭 정리하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네요.
영상 속 그녀는 종이쇼핑백 하나를 접는데 1분도 걸리지 않던데 저는 접었다 구겼다는 반복 하며 30분이 걸리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쓰지 않는 종이쇼핑백으로 칸을 만들어 정리하는 알뜰함을 선보일 생각에 신이나서 끝까지 정리할 수 있었어요.
짜잔.
해냈어요.
이렇게 줄 맞춰 자리 잡고 있으니 어찌나 뿌듯한지요. '◡'
서랍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기를 반복하며 눈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는 어찌 자랑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앞서 액정보호필름 실패와 서랍장 정리를 남편 손에 겨우 마무리 한 썰은 양말서랍장을 자랑하기 위한 성공을 다분히 계획적인 설정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만큼 전 지금 매우 기분이가 좋습니다.
내일 아침 등교준비를 하려고 서랍을 열어 환호해 줄 남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MBTI 가 P로 끝나는 자는 이 정도의 정리로도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등굣길 서랍장을 열어본 아들 : 변화를 1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양말만 신었음. (흥칫뿡)
다음 순서로 서랍장을 열어본 딸 : (작은 소리로) 와! 단발의 감탄을 날리고 그저 양말을 신었음. (에라이)
(다음날. 아들의 요청 때문에 글을 정정(?)합니다. 제가 종이쇼핑백을 접고 있을 때 옆에서 '잘 만든다' '엄마 잘한다' 크게 감탄해줬다고 합니다. 저도 듣고 대답까지 했다는데 아마도 집중하면서 얼덜결에 답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서랍을 보고 '와 잘했다' 혼잣말도 했다며 윗글에서 세상 무심한 아들인 듯 표현된 것에 대해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울아들은 참으로 엄마의 노고를 알아주는 고마운 아들이었음을 다시 알리는 바입니다. 울아들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