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던 만 나이, 연 나이, 한국 나이가 얼마 전 통일됐다.
생일이 지나지 않은 덕에 난 2살이 줄었다. 한국 나이 43이 이제는 만 나이 41로 고정된 것이다.
나이를 줄여준 것이 반가울 만도 한데 현실에서 사용하던 한국 나이와 서류에 찍힌 만 나이의 차이가 추는 쾌감을 즐기던 내게는 퍽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약국에서 약봉투를 받아 들 때마다 기분이 좋았는데 아쉽게 되었다.
내 생일은 11월이라 1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만 나이로는 2살 어려졌다.
평소 한국 나이로 살다가 처방을 받아 약국에서 약을 받으면 2살 어린 나이를 명시한 약봉투로 돌려주니 그 만족감이 꾀나 달았다.
“두 살이나 빼주네, 횡재다. ”
아주 바보 같은 만족감이다.
종이에만 찍혀있을 뿐 곧바로 한국 나이로 리셋되는 줬다 뺐는 셈법이었지만 그 순간이 좋았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음에도 가상으로 나이를 2살 어리게 해 준다는 느낌이 공짜로 시간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약봉투에 두 살을 빼주는 뜻밖에 선물에 기분이 좋아진 탓에 현실감 없는 상상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가령 약봉투에 적힌 대로 2년 전 나이의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그것이다.
“약봉투 속 2살 어린 선화야. 하루하루 고되고 힘들어도 지금 네 곁에 놓인 행복을 놓치지 말아 주렴. 41살의 삶을 누리면서 천천히 43이 되어 만나자. ”
한편 현재보다 2살이 어려지니 지금의 나를 짓누르는 책임감, 부담스러운 삶의 무게 중 일부는 공짜로 얻은 시간만큼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약봉투를 받아 든 순간만큼 찰나의 유예 시간을 누려보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동안 내게 약봉투는 시간 여행자의 타임 스톤처럼 2년이라는 과거를 다녀오는 듯 짜릿한 선물이었다.
그 덕에 난 약과 함께 가끔은 위로를,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함께 받아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모든 복잡함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통일한 한 개의 숫자만 남았다.
이제는 2년이라는 여유 시간을 선물 받는 마법의 봉투는 없다.
한국 나이로 살다가 만 나이의 나를 만나 건네는 따듯한 인사도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으면 여름이 오기 전에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어깨 통증 치료를 받았어야 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약봉투 속 2살 어린 나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를 영영 놓치고야 말았다.
이제는 약국에 가서 2살 어린 나를 만날 수 없다.
봉투에는 그저 쓰디쓴 약만 담겨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