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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Apr 24. 2023

작전명 위장전술(酒)

가정의 평화는 빈속에 맥주가 지킨다





단전, 저 깊은 곳에서 응축된 한숨이 올라온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작전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름하여, 위장전술(酒)


퇴근과 동시에 다시 출근하는 워킹맘의 삶.

집에 들어서서 마주한 현실에 깊은 빡침이 몰려든다.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이 바로 위장전술(酒)이다.

빠르게 냉장고를 열고 늘 상비되어 있는 맥주를 꺼낸다.

500 짜리 캔맥주를 전용 머그컵에 옮긴다.

보통의 컵보다 큰 머그컵이라 500 캔맥주가 한 모금 남고 다 담긴다.   

남은 한 모금은 바로 꿀꺽.

연이어 머그컵 상단 1/3이 드러날 때까지 단숨에 마셔버린다.


종일 일하고 피곤한 몸,

아직 저녁 먹기 전 텅 빈 속에 맥주가 들어차면 눈앞에 안개 같은 몽롱함이 찾아온다.

덕분에 '나는 관대하다' 모드로 변신완료.

위장전술 작전이 시작된다.






평소모드

퇴근 후 집에 오면 바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틈틈이 밴드에 올라온 아이들 숙제 등을 챙긴다.

산적한 집안일을 번개같이 해치우고 저녁 먹은 설거지를 식세기 이모님께 부탁드리고 재빨리 다시 식탁에 앉는다.

이때부터 초등 남매와 계획대로 집공부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집공부를 하는 동안 엄마인 나도 함께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다.  

피곤하지만 이렇게 해야 잔소리 없이 들썩거리는 아이들 엉덩이도 붙여놓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매일매일 아이들 진도도 확인할 수 있고 남매의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해 줄 수 있다.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아이들 공부가 끝난다.

정해진 자기 공부를 다한 아이들은 유튜브와 게임을 위해 흩어진다.

이제 두번째 출근도 퇴근을 할 때다.

아침 처음 출근부터 12시간이 지나서야 고단한 몸을 쉬게 할 수 있다.   



위장전술(酒) 모드

집공부는 강제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빡빡한 매니저 역할을 겸해야 한다.

하지만 위장전술을 펼친 날에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관대한 엄마가 된다 .  


온 집에 굴러다니는 먼지에게도 더 구석구석 누릴 자유를 허한다.

건조기에서 꺼내져 쌓아두기만 한 옷 무더기도 실컷 구겨져 버리도록 내버려둔다.  

애들은 공부하는데 방에서는 게임하는 적군 같은 남편도 이날만큼은 너그럽게 웃어넘긴다.

아이들도 공부 안 하고 놀궁리만 해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나는 관대하니깐 ˘◡˘







맥주를 굳이 머그잔에 옮겨 담아 마시는 것은 애미가 술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다.

애미의 음주를 철저한 은폐·엄폐 했음에도 본적으로 달라진 집안 공기를 파악한 남매는 때를 놓치지 않는다.

자기 공부를 다하지 않으면 허락되지 않는 유튜브 시청권을 따내기 위해 애교작전을 펼친다.


(둘이 동작까지 맞춰서)

'우리는(에 맞춰 팔을 벌리고), 유튜브 하나 보고 싶어요~ (할 때 하트가 완성된다)'

 



 ˃̵ ᴗ ˂̵

나는 관대하니깐,

허한다.






남매는 깔깔거리며 유튜브를 시청하고 기분좋게 자기 공부를 시작한다.

눈총과 잔소리 없이 게임을 즐긴 남편은 스스로 집안일을 수행하는 기적을 행한다.

나 아니면 안될거라고 여기며 바짝 긴장하고 분주하던 내가 없으니 집안이 한결 평화롭다.


위장전술(酒),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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