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하고 시간이 되어 퇴근하는데 왜 지체 없이 바로 퇴근한다고 딴지를 거르는지 모르겠다.
웃기는 건 내게 칼퇴라는 단어를 쓰는 집단은 동료 교사나 학부모가 아닌 파릇파릇한 10대 학생들이라는 점이다. 평등과 인권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칼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꼰대같아 늘 거슬렸다.
교무실에서 가장 먼저 퇴근하는 분들의 단골 멘트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이다.
왠지 먼저 퇴근해서 꾀나 송구하다는 듯 살짝 꾸부정한 자세로 빠져나가면서 조용히 건네는 인사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왜 파워 당당 '퇴근합니다.' 를 외치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훗, 막상 나도 '퇴근합니다.' 라고 인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느낌까지 내고 싶지는 않아서 고르고 골라 택한 게 '내일 뵙겠습니다'다. 고작!
동종업계 종사자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는 퇴근할 때 뭐라고 인사하고 나와?" / "먼저 가겠습니다. "
"자기도 정시 퇴근시간에 나오면 겸연쩍어서 그러는 거야?" / "아니 먼저 가니깐. 그대들도 보다 먼저 간다는 내 행동에 대해 말한 건데"
이 말이 이렇게 단순한 의미일 수 있구나.
수년간 난 먼저 간다는 인사를 거슬려했는데 이 남자에게는 심플했다.
내친김에 칼퇴라는 단어는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체 없이 바로 퇴근하면 왜 안되냐고 종로에서 맞은 뺨을 그에게 흘겼다. 이번에도 그의 답은 쉬웠다.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 따라 다르지. 받아들이는 사람 따라 다르고. 내 퇴근이 당당하면 칼퇴든 정시퇴근이든 단어가 뭐 그리 중요해. " / "...당당하면? "
그 동안 칼퇴라는 단어에 민감했던 게 혹시 내 안의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처음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칼퇴의 부정적 이미지가 싫었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며 싸잡아 신경질을 부렸는데 역으로 받아들이는 내 안에 문제라고 생각하니 혼란스러웠다.
왜 난 칼퇴라는 말에 민감했을까?
무엇이 거슬렸던걸까?
내 속을 헤집어봐야했다.
곰곰이 마음을 훑어보았다.
기억도 하나씩 소환해봤다.
처음 교직을 시작하던 때는 0교시, 방과 후 수업(당시는 보충수업이라 했다), 야간자율학습이 의무였다.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남아 학교를 지켰다. 방학이라고 해도 학기 중과 비슷한 수준의 보충수업 시간표가 만들어져서 운영되었다. (특별히 내가 근무하던 학교가 비평준화지역에 이름난 학교라 유달리 빡쎘다.)
보통 7시 30분쯤 출근하면 7시 50부터 0교시가 시작된다. 정규수업과 마지막 보충수업이 끝나면 저녁 7시. 그나마 야자 감독이 없으면 이 시간에 퇴근이다. 이미 12시간 근무. 하지만 야자 감독이 있으면 밤 11시가 넘어야 교문을 나설 수 있었다. 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7시간 남짓. 잠만 자고 다시 학교에 출근했다.
그런데 그렇게 쎄 빠지게 일하다가 가는 날 몸은 천근만근인데 변태같은 쾌감이 있었다. 내 청춘을 희생하는 꾀나 훌륭한 교사가 되고 있다는 기분에 취한 것도 같다. 개인의 삶은 사라진 채 희생적으로 일하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다. 순종적으로 부려먹혀지고 있었다.이제는 사라져버린 라떼시절이지만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내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퇴근시간 보다 1-2시간 더 일하고 초과근무수당을 받으려면 꼬박꼬박 상신을 해야하는데 난 늘 그 행동 앞에 머뭇거린다. 좀 더 일하는 걸 생색내는 것 같아 조용히 내 할일을 하고 퇴근하며 자기 만족으로 끝내버린다. 여전히 내 시간과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소심하다.
이제사 내 안에 문제가 보였다.
내 안에 노예근성
주지않는 눈치를 스스로 만들며 사는 노예근성으로 누려도 되는 권리와 자유를 떳떳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노예근성이 칼퇴하는 나를 자체 검열해서 지체없이 퇴근하는 것이 찔렸던 것 같다.
한편 당연한 걸 누리지 못하고 주눅든 내 모습이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칼퇴라는 단어에 치켜세운 가시는 내 안의 노예근성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노예 근성을 버리자.
하루 아침에 될리 없지만 당당하게 퇴근 인사를 날리는 연습부터 해보려 한다.
칼퇴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었으니 조금도 지체 없이 내 가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젠 눈치보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