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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Dec 07. 2022

학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교사가 되었습니다






학부모 상담이 부모에게는 긴장되는 시간이라는 걸 입장이 바뀐 다음에야 알았다

잔뜩 움츠러든 상태로 큰 아이의 학부모 상담에 참여했던 그날을 기점으로 난 이전과 다른 교사가 되었다.

아이는 7살, 유치원 학부모 상담을 하러 갔던 날이다.

 

아들의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수업하는 교실에서 그림과 작품 등을 보여주시고 유치원 생활도 이야기해주셨다. 등원부터 하원까지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놀이를 좋아하고, 밥 먹을 때 습관은 어떤지 정말 세세히 관찰하고 전달해주셔서 내심 놀랐다. 간단하게 몇 가지 특징만 이야기해주실 거라 여겼는데 예상 밖이었다. 이렇게 아이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전달해주셨음에 놀랐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원장 선생님의 철학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 원장 선생님께서 직원회의 시간에 선생님들께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고 한다. 원장 선생님의 말씀은 그날 이후 내 교직 생활을 바꿔놓았다.



선생님이 지금 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정에서는 보지 못합니다.
부모님은 아주 궁금해하는 소중한 아이의 일상을 독점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지 마세요.
그리고 그 시간을 가정에 꼭 전달해주는 것도 선생님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 잘 지내나요?"

"친구 관계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라서 교실에서 잘 어울리는 늘 걱정입니다"


고등학생이면 다 컸는데 뭘 그리 궁금한 게 많으실까 살짝 귀찮아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막상 대답을 하려고 해도 답변이 궁색할 때가 많아 난감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담임교사는 교무실에 머문다. 담임 반 아이들과 아침 저녁 조회, 종례 시간에 잠깐, 그리고 담당 수업 시간에 만나는 게 전부다. 그러니 아이들을 파악하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고등학교 교사는 담임 업무 외에 각 교과 수업 준비(교고학점제 이후 학기당 3과목 정도를 담당한다), 과목당 2-3개씩의 수행평가 준비 및 채점(학기당 3과목 * 과목당 2-3개 수행평가 = 6~8개의 수행이 진행된다는 얘기), 담당 행정 업무, 학생 및 학부모 상담, 학기당 두 번 과목별 시험 문제 출제, 수시로 발생하는 각종 학생 관련 사안들, 학교 행사 준비 등등으로 늘 시간에 쫓기며 산다.... 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다. 진짜  일이 치이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담임 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소홀했음도 사실이다. 교사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아이들과의 소통이거늘 업무가 바쁘다고 미뤄두고 있었다. (사실 아이들과의 소통을 생략해도 교사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소통을 위해 노력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적어도 윗분들에게는) 


공문에 밀리고, 수업에 밀리고, 출제에 밀리고, 채점에 밀렸던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문제는 물리적인 시간 부족


마트에서 시간을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털 뽑아서 날 하나 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늘 해보는 상상이다. 뛰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구입할 수는 없을까? 나와 일을 나눠할 분신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없으면 쥐어뜯어야지 별 수 없다 쉬는 시간 10분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침 조회가 끝나면 1교시 수업 시간 전까지 10분은 교실에 머물렀다. 이 시간은 주로 아이들 컨디션을 살피며 교실을 어슬렁거렸다. 어제 머리 아파서 약을 먹었던 아이가 오늘은 괜찮은지 살펴본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워보여서 툭 건드려보면 갑자기 우는 아이도 있다. 아침에 엄마랑 대판 싸우고 온 일이 마음에 걸리고 속상해서라고 털어놓는다. 특별한 위로 없이 토닥토닥해주면 시원하게 울고 조금 후련해한다. 딱 4자만 엄마한테 톡 하라고 말해준다. '엄마 미안'.  상황이 가볍게 종료된다. 아침을 못 먹고 나온 아이들은 슬금슬금 내 간식 통으로 다가온다. 보통은 마이쭈 따위만 들어있지만 종종 빅파이가 들어있는 횡재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아침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아이들을 살피는데 꾀 유용했다.


3교시 수업이 있을 때는 수업 시작 10분 전, 쉬는 시간에 담임반 교실부터 들린다. 체육이나 특별실 수업이 있어서 교실이 비어있으면 슬쩍 포스트잇에 응원 문구를 적어서 한 명 한 명 필통에 몰래 넣어놓기도 했다. (한놈만 써주면 삐칠까 봐 나름 순서를 기억하며 적어줘야 한다) 담임이 교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 못하고 신나게 욕을 발사하며 들어오던 애들이 놀라서 뱉은 말을 주어 담는다. 친구에게 놀러 오려던 옆반 아이도 담임이 있는 걸 보고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가만히 교실 구석에 있다 보면 아이들 친구 관계도 쉽게 파악이 된다. 싸운 게 다 티 난다. 내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기 전 다시 담임 교실에 들러 머물다가 간다. 이렇게 담임이 교실에 머무는 것 만으로 교실이 안정되고 자잘한 사안들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조회, 종례 때는 일방적으로 전달사항 읊어주기 바빠서 아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부모 세대가 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요즘 K 고등학생들은 생활기록부를 알차게 채우기 위해 학교에 수많은 행사, 학생회, 강연,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해야 한다. 때문에 전달할 것이 늘 복잡하고 많다) 하지만 쉬는 시간 10분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오늘 급식 메뉴, 앞 수업 시간에 있었던 에피소드, 어떤 선생님의 험담 등등 아이들과 시시콜콜한 수다가 늘어갔다. 담임이 교실에 있으니 할까 말까 고민하던 질문도 자연스럽게 물어왔다. 선택 과목을 뭘 해야 할지, 진로가 없는데 생활기록부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조회 때 말한 프로그램을 하는 게 좋을지 말지, 그리고 친구 문제까지 대화가 오고 갔다.


고작 10분.

조회, 종례 시간과 10분 몇 개가 더해져서 하루 1시간 정도 교실에 머물면서 나는 비로소 아이들의 일상에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분은 제대로 대화를 이어가기에 부족할 때가 많다. 그럴 땐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집에 좀 늦게 가면 된다 (내 새끼들을 좀 더 방치하면 시간은 생긴다... 쩝! )  







이젠 학부모 상담 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수 있다  

아이의 학교 모습을 전달할 수 있도록 충실한 관찰자가 되어 궁금증을 해결해드릴 수 있다.


렇게 학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교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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