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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Nov 19. 2023

게임 중독, 아들이 문제가 아니었네


얼마 전 딸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나 HME 선물로 수박게임 해줄 수 있어?


남매는 매 학기 해법수학학력평가(HME) 시험에 응시한다.

시험 전 약 한 달간 기출문제를 풀며 공부하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2-3만 원가량의 선물을 준다.

아이가 말하는 HME이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선물로 물건 대신 유료 게임을 설치해 달라는 것.  

열심히 했으니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는 쪼르르 아빠에게 달려갔다.

허가는 엄마 소관이고, 설치는 아빠 역할이라는 우리집 생태를 알고 있음에 피식 웃음이 났다.

새로운 게임이 설치된다는 소식이 금세 아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렇게 나 빼고 게임 좋아하는 김씨들 끼리 꼼냥꼼냥 닌텐도에  게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왜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다.

가상의 세계에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인가.

시간 낭비다.

혀를 끌끌 차며 우아하게 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는 가의 말에 집중하자.

 

띠링.

2,500원이 결제되었다는 알림.

금액을 물어보지도 않고 허락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

3만 원 한도의 선물이 2,500원으로 해결되니 개이득이 아닐 수 없다.

돈 굳었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상자 위에서 과일을 하나씩 떨어트린다.

이때 같은 과일끼리 부딪히면 다음 단계 과일로 진화한다.

체리가 → 딸기로 → 포도로 → 오렌지로 → 감으로 → 사과로 변신하는 식이다.

과일의 최종 진화 단계는 이다.  


게임이 설치되고 온 가족이 쪼르륵 소파에 앉았다.

엄마랑 함께하고 싶어 하는 딸아이 요청에 기꺼이 책을 내려놓고 함께했다.

8개의 눈동자가 경쾌한 배경 음악과 함께 과일의 진화에 집중하니 여기저기 훈수가 풍년이다.

헌데 막상 게임을 설치해 달라던 딸아이는 생각보다 재미없다며 시큰둥이다.

대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조이스틱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

.

.

나.

.

.

.

쩝.

인정한다.

재미있다.

작은 과일이 합체하며 점점 커지는 것이 이리 흥미로울수가.

처음 게임을 설치해 달라던 딸아이를 포함 다른 김씨들도 별거 아니라는 듯 한두 번 해보고 모두 자리를 떠나버렸다.

게임을 왜 하냐며 우아 떨던 나 혼자 남아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

진화할 때 귀엽게 '퐁'하는 소리와 함께 과일이 살짝 튀어 오르는데 그 순간의 짜릿함을 느끼면서.

게다가 차곡차곡 빌드업해 둔 과일들이 연쇄반응으로 파파바~박 순서대로 진화하면 그 쾌감은 제법 강렬한 것이다.

재밌구먼.


그런데 면이 서질 않는다.

엄마 아직도 해?


평소 게임을 터부시 하던 엄마가 보이는 낯선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건네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랬더니 눈앞에 동글동글 과일들이 굴러다니고 급기야 머릿속에서 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안 되겠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

남매가 잠들고, 그러고도 좀 더 기다린 후 안전하게 밤 12시에 돼서야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30분만 해야지,

하나만 만들고 자야지(수박, 그까짓 게 뭐라고), 라는 다부진 목표를 정하고 게임 스타트.


그런데 게임이란 것이 적당히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쉽게 끝나서 한판 더.

생각보다 점수가 낮아서 한판 더.

기록을 세우고 싶어서 한판 더.

을 만들지 못했으니 한판 더.

얼떨결에 그냥 다시 시작을 눌러 한판 더.

그렇게 하품하느라 눈물이 맺힌 눈을 비벼가며 게임을 이어갔다.  

대체 왜 가상 세계에 시간을 낭비하냐고 고상한 척하더니 꼴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어깨가 뻐근하다 싶어 시계를 보니 2시다.  

나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 •︠ˍ•︡ )


다음날에도 퇴근 후 어서 빨리 둥근 둥글 과일들을 굴려 을 만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열의가 샘솟았다.

그런데 다시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잠이 부족해서 낮에 너무 힘들었다.

체통을 지킬 때가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겜밍아웃.

저녁을 먹자마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소파에 자리 잡다.

어차피 우리집 법은 나다.

아이들처럼 게임을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 없으니 그냥 하자.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시작해서 딱 30분만 하고 설거지를 하면 되는 것이다.

깔끔한 시간 할애에 스스로 감동하며 게임시작.

그리고 가볍게 2시간이 잡아먹고 나서 남편의 아직도 하냐는 핀잔을 듣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어쩐지, 조이스틱을 쥐고 버튼을 누르던 엄지 관절이 아프더라니.


저녁으로 먹은 꼬치어묵도 제대로 치우지 않고 저러고 있는 애미를 딸아이가 찍어둔 것.



그런데 말이다.

게임, 은근 심오하다.

인생사 새옹지마가 담겨있달까.

진화를 위해 체리 한 알 한 알을 신중히 내려놓는다.

차례대로 진화할 수 있도록 철저히 설계하면서.

하지만 다음 과일이 내 뜻대로 나오지를 않는다.  

보너스 점수를 받기 위해서 빈칸 없이 테트리스 블록을 쌓아놨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4칸짜리 긴 막대기가 나오지 않아 야속하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원하는 과일이 안 나오면 모든 게 꼬이는 것이다.


상자에 여유 공간이 있다고 방심하다가 당할 수도 있다.

갑자기 과일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튀어 오르면서 상자 밖으로 튀어나가 예상치 않게 게임이 끝나기도 한다.

공든 탑도 무너지는 거다.


하지만 반대 경우도 있다.

진화를 못해 상자 가득 과일이 쌓이면서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예상 못한 곳에서 미묘하게 움직이던 과일들이 자기들끼리 진화를 한다.

파파바박~ 하더니 순식간에 복숭아가 생기고 상자에서 여유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개꿀잼.

그래 이맛이다.

구구절절이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

 만들기가 영 쓸모없는 아니라는 돼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야하기 때문.

민망하니깐.

( •́ ̯•  )




그제사 아들의 지난 말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된다.


평소 큰 아이는 그날 자기에게 주어진 공부를 끝내면 보상으로 게임시간 1시간이 받는다.

그것도 8시 반 이전에 공부가 끝나야 한다.

그래야 1시간 게임하고 9시 반에는 잘 준비를 할 수 있으니 정해놓은 데드라인이다.

할 일을 다 했는지 확인하고 비밀번호로 잠겨있는 컴퓨터를 열어 딱 정해진 시간만큼만 사용하도록 설정해 준다.

종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면 몇 번의 종료시간 예고 메시지가 뜨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얄짤없이 컴퓨터가 꺼진다.

헌데 아들은 게임에 빠져 미처 게임을 저장하지 못하거나 시간 계산을 못해서 1시간의 노력을 날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억울하다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안쓰러워 이후부터는 1시간 게임에는 10분을 같이 붙여준다.

저장하고 마무리할 시간 여유늘 준 것.

하지만 아들은 나의 배려의 10분을 저장시간이 아닌 추가 게임시간으로 사용했다.  

1시간을 넘기고 1~2분 안에 끝내는 게 아니라 1시간 이후 9~10분 까지를 최대한 써먹고 컴퓨터 강제 종료 전에 마무리를 하는 거였다.   

이때부터 내 잔소리는 속사포로 발사된다.


1시간 하기로 했으면 미리미리 시간 보고 마무리해야지 왜 자꾸 넘겨.

(시간이 다 되었는지 몰랐다고 하면) 얼마나 게임에 빠져있으면 시간도 볼 수가 없어.

(매번 시간 제한을 걸어 놓으면서도) 게임 중독이 되면 누구 손해야.

(걱정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지만) 팝콘뇌 되고 싶어?

(하던 판은 끝냈어야 했다고 변명하면) 그러게 시간을 넘길 거 같으면 그 판을 시작하지를 말았어야지.

(딱 한 번만 더하면 레벨업 할 수 있을 거 같았단 말이야, 라고 하면) 그걸 조절 못하면 그게 게임 중독인 거야.

(이제부터 무논리 억지버전이다.) 그래서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눈도 나빠지고 자세도 나쁘고, 게임만 하다가 바보 된다니깐. 아니 게임이 뭐가 재밌다고 그 난리, 집착하는 거야. 아휴 아휴 ~ (더 긴데 생략하는 거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1시간이 순삭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는 말도 뻥이 아님을 알았다.

아무리 게임을 좋아해도 어차피 1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컴퓨터가 꺼지는데 뭣하러 발생하지도 않은 미래의 상황까지 상상하며 게임 중독까지 걱정했나 싶다.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으면 팝콘뇌가 될까 봐 걱정했는데 은근 게임하며 잔머리를 쓰니 굴리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다.

오히려 좋아질 수도.

딱 한판만 더, 그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면 약속 시간을 어긴 것이다.

그래봤자 5분이다.

그걸 못 참고 저리 잔소리하며 아이를 잡은 거다.

그간 정말 한판만 더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엄마가 미친 잔소리를 퍼부었구나 생각하니 아이는 제법 야속했겠다 싶어 그 심정이 헤아려진다.

미안해, 아들.

애미야, 너나 잘하자.



어제였다.

아들이 좋아하는 게임 베드워즈가 이번 시즌을 마감하고 다음 시즌이 시작된단다.

그 과정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아들이 한 걱정을 한다.

아들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을 요약하자면, 몇 개월을 쌓아온 게임 리어가 시즌이 넘어가면서 사라질 위기라는 것.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현질로 아이템을 사는 것이란다.  

평소 가상현실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애미가 현질은 더욱 극혐 하는 걸 아는지라 아이는 무척 신중하고 정중하게 게임 아이템을 살 수 있도록 부탁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의 설명을 들었다.

사실 게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정확히는 모른다.

암튼 돈으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차렸다.

평소 같았으면 짤 없을 얘기다.

게임이 왜 돈을 써.
아니 가상세계에 왜 집착이야.
그게 현실이야? 가짜잖아.
그거 없음 어때서? 사는데 지장 없어.


그런데 아들의 마지막 멘트가 내 심금을 울렸다.

엄마, 지금 수박 두 개가 만들어졌다고 하자.
진짜 다시는 수박 두 개를 만들기는 힘들 거야.
그런데 그 사이에 체리가 하나 끼어있는 거야.
그게 수박 두 개가 만나 진화하는 걸 방해하는 거지.
지금 답답해 안 답답해?
근데 현질을 하면 그 체리를 없애준다.
비싸지도 않아.
그럼 현질을 해야겠어 말아야겠어.
잘 생각해 봐.
수박 두 개는 진짜 어려운 거라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하나도 만들기 힘든 을 두 개를 만들었다니, 대박.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만든  사이 체리가 껴있다.

몹쓸 체리.

게임 화면을 상상하니 세상에 그렇게 안타깝고 억울한 상황이 있을까 싶다.

진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아까워서 답답하기까지 하다.

역지사지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만든 사자성어였다.


그렇게 아들의 현질을 허락했다.

물론 앞서 딸아이와 같이  HME 선물이라는 조건이 달리긴 했다.

생각보다 쉽게 엄마에게 현질을 허락받은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들에게 현질을 허락한 나는 너도 게임하니 나도 맘 편히 하겠다는 심산으로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만들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당당히 아들의 기록을 깼다.


현재 우리집 수박게임 최고 기록은 2874점.

바로 나닷

 ง •̀_•́) ง

음화화화



일주일 동안 실컷 게임을 했더니 다행히 나도 게임이 좀 지루해진 감이 있다.

 두 개 만들 때까지만 해봐야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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