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emis (2016)
한 달 전쯤 할머니가 통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잠시 공단에 데려다 달라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연명의료에 대한 거부의 뜻을 미리 밝혀 두기 위한 문서다. '임종 과정에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부착 등으로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 명료하고 단호한 연명의료의 정의가 여전히 아프게 다가온다. 치료해도 효과 없을 거라는 의학적 판단과 '삶'을 대신한 '임종 과정의 기간'이라는 말. 할머니는 할아버지도 동행해서 문서를 같이 쓰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생각했다. 누가 우리 조부모를 부추겼는가. 이 정보는 어디에서 들으신 건가. 나는 할머니가 여든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이용하고 계신 단톡방을 떠올렸고, 유튜브를 원망했으며, 최근에 읽고 계신 존엄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의심했다. 마지막을 너무 이르게 준비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다. DSLR 카메라를 빌려다 직접 장수사진을 찍어드린 지 1년 만이었다. 가족사진 촬영을 이유로 모였던 그날, 뷰파인더에 눈을 밀어 넣으며 한편으로 슬퍼지는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죽음과 죽음 직전의 고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제도와 하루 일과가 부담됐다.
모두가 기적을 원하죠.
미국의 한 중환자실. 다큐멘터리 익스트리미스의 카메라는 임종을 앞두고 기관절개술을 시행할 건지 논의하는 환자와 가족과 의사의 시선을 따라간다. 환자들은 손가락으로 알파벳을 가리키는 방법, 혹은 38세의 또렷한 목소리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방법, 또는 기관절개술을 설명하는 남편의 목소리에 고개를 젓는 방법으로 자기 의사를 밝힌다. 가족들은 감정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기적을 원하거나 의학적인 판단을 따른다. 중환자실에는 엄마의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아빠의 결정을 묵묵히 따르는 딸의 눈물이 흐르고 여동생의 연명치료를 놓고 서로 엇갈리는 오빠들의 토론과 기도 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의 시점은 존엄한 죽음을 권하는 의사의 시선을 따라간다. 의사는 권한다. 호흡기 튜브를 제거하고 1~2일 동안 편안하게 대화하며 마지막을 함께하라고. 의학적 예후에 따르면 환자의 상태는 앞으로 점점 나빠질 거라고. 자신에게도 매번 힘든 판단이라고 전하며, 의사는 남은 시간 고통을 증가시킬 건지 아니면 환자의 큰 결심을 따를 건지 환자의 가족과 두 눈을 맞추고 대화한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마치 이런 문제에는 정답이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명의료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 고통의 시간이며 기적을 바라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일 뿐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미리 결론 짓기 싫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날 저녁, 제도에 대한 안내 책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 봤다. 혹시나 가족의 뜻으로 연명의료를 다시 결정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내 조부모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지 살폈다.
생각이 또렷하실 때 당신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니 존중하고 따라야 마땅하지만, 내 마음은 노인의 것처럼 단단하지도 담담하지도 못했다. 기사를 찾아 보니 많은 어르신들이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라는 이유로 이 서류를 쓰러 공단과 보건소에 방문하신다고 했다. 부담이라면 치료비를 말하는 것이겠지. 돈 때문인가. 돈도 문제가 된다. 하지만 생명보다 중요한가. 마지막 순간에 기적이란 그 정도로 희박한 일인가. 나는 존엄사에 대해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내 태도가 한낱 가식임을 깨달았다.
다큐멘터리 익스트리미스는 결정의 순간, 그 이후를 후일담으로 전한다.
도나는 호흡관을 제거한 하루 뒤에 세상을 떠났다.
셀레나는 호흡 보조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 후 약 6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잠시나마 의식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