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2019)
작년 초, 겨울의 막바지에 '윤희에게'를 봤다. 친구들이 올리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영화 포스터나 스틸컷을 실컷 구경한 후 영화관에서도 더 이상 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때쯤이었다. 인생 영화로 꼽는 친구들도 있었다. 몇 번 추천도 받았다. 나는 특정 영화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미루고 미뤘다 숙제처럼 보는 타입이다. '모두가 마음에 든다고 했을 때 휩쓸려서 내 감정대로 영화를 보지 못할까 봐'가 아마도 적절한 핑곗거리가 될 것 같다. 타이타닉, 노트북, 맘마미아 같은 고전들도 내 영화 목록의 맨 끝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재개봉 때야 슬쩍 가서 보거나, 문득 생각이 나 틀거나 하는 것이다.
영화는 내리 잔잔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마지막 윤희의 대사에서 앞의 모든 줄거리를 잊어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그 마지막 장면을 한 번 더 돌려봤다. 낮게 깔린 윤희의 목소리에서는 잘게 소름이 돋았다.
내 것이 아닌 기억과 감정을 엿보는 것은 항상 두근거리는 기분이 든다. 영화는 그러한 마음을 담은 새봄의 시선으로 흘러간다. 엄마를 수신인으로 하는 편지로 시작된 작은 이벤트로 모녀는 오타루 여행을 시작한다.
윤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그리고 이혼 끝에 다 큰 딸아이와 함께 하루하루를 건조하게 살아간다. 윤희는 이따금씩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이 어찌나 건조한지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남을 외롭게 하는 사람은 실상 자신이 제일 외로운 사람이다.
사랑을 받을 줄 모르고, 사랑을 줄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벽이다.
윤희는 타의로 외로운 사람이 됐다. 쥰과는 이내 떨어져야 했고 윤희는 병원을 다녔다. 윤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윤희는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렇게 생긴 딸이 새봄.
새봄도 퍽 씩씩하다.
살갑지 않은 엄마한테 상처받지 않는다. 엄마가 이루지 못한 어떤 것을 위해 귀여운 여행 계획도 짠다.
나는 윤희의 딸로 태어났다면 아마 새봄처럼 자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타고나기를 애정이 필요한 사람이라 이혼한 남편처럼 '엄마는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아, 애초에 윤희와 살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딸의 상처를 보듬는 장면도 윤희에게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한결 편안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은 윤희니까.
인물 사진은 안 찍니?
네, 전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
인물 사진은 안 찍는다는 새봄은 윤희를 찍는다.
누군가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은 참 묘한 행위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대로 카메라에 그 사람을 담는다는 행위 자체도 그렇지만 결과는 더 묘하다. 나는 인물 사진을 좋아한다. 특히 필름에 담긴 인물 사진을. 필름은 빛에 아주 예민한 만큼 같은 각도에서 찍어도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올 때가 있다.
내게도 그런 사진이 있다. 연속으로 두 장 찍힌 사진이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사람 같은 한 사람. 햇빛이 잘 들어 노랗고 따뜻한 느낌으로 나왔던 사진과, 순식간에 햇빛이 사라지며 얼굴에 군데군데 그늘진 차가운 모습이 드러났던 사진이었다. 얼마나 애정을 담아 찍느냐도 사진의 느낌을 좌우한다. 윤희에 대한 애정이 녹아든 탓일까. 새봄이 담은 윤희는 아름답다.
영화가 좋았던 점은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 쥰과 윤희는 만나 나란히 걷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현한다. 격한 포옹이나 어색한 안부 인사로 그들의 대면이 시작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걸음 밑에서 부서지는 눈이 나 대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괜히 간질거리고 속이 복작대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20년을 보지 못한 첫사랑은 눈빛만 얽혀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구나. 나는 첫사랑이 없어 모르겠다. 내가 가지지 못한 감정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윤희가 느끼는 감정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연출의 고민이 깊어지면 접하는 관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윤희는 자신의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환상도 끝났다면 나는 아마 이 영화를 다시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개봉하고 두 번째 겨울도 윤희에게와 함께한 이유는 윤희가 흘러가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건조했던 삶에 빛이 들기 시작한다.
윤희는 한국에 돌아가 새로운 이력서를 적는다. 그리고 쥰에게 보낼 답장도.
오타루에서의 나날이 그저 환상으로 끝나지 않아서, 윤희가 용기를 내기로 결심해서 다행이다. 수신인을 잃은 편지가 이제는 우체통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기가 막힌 마지막 내레이션.
추신. 나도 네 꿈을 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