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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an 31. 2021

제 발로 걸어나간 이방인인가, 내쫓긴 이방인인가?

죽음 앞에서 비로소 빛나는 삶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방인-




책의 원제는 L'Étranger다. 

Étranger는 본래 외부의, 외교의 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한국에 들어오면서는 '이방인'이라는 제목을 얻었다. 

잘 번역된 단어라고 생각한다. 동명의 영화 역시 영어로는 'The Stranger'라고 번역됐다. 역시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방인이다. 

찾아보니 '이인(異人)'이라고 번역한 책도 있었다. 이인도 참 괜찮은 번역인 것 같다.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 다른 사람, 외국 사람 등으로 풀이를 할 수가 있는데 아마 이인으로 번역하신 분은 다른 사람에 집중을 하신 게 아닐까. 


소감부터 말하자면 어려운 책이다. 

빠르게 진전되는 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뫼르소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책은 약 140p 가량의 분량의 5부로 구성된다. 예의 고전이라 함은 손목에 부담이 갈 정도로 두꺼운 책이 대부분인데 비해 산뜻한 편이다. 내용은 무겁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다. 

뫼르소는 왜 이방인일까. 


연휴를 이용해 고전에 도전해봤다.


뫼르소는 평범한 젊은 청년이다.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평범의 범주에서는 살짝 빗겨나 있다. 뫼르소는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담배, 여자, 술. 욕구는 있으나 정서적 교감에 대한 의무감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여자가 결혼을 이야기 해도, 심지어는 사람을 죽여도 소설 속 뫼르소의 감정선은 덤덤하다.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범지어 놓은 것에서부터 뫼르소는 자유롭다. 


뫼르소는 자신에게 '사랑', '친구'와 같은 통념적인 감정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의아해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박탈감을 느끼지도, 정서적인 혼란이 느껴지지도 않는 뫼르소의 모습은 사람을 죽이고도 계속된다. 죄책감, 자조적인 태도,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뫼르소는 그저 징벌에 대해 이해하고 순응하며 재판부의 손에 넘겨진 자신의 운명을 바라보기만 한다. 



사회가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판단할 증거는 충분했다. 사회가 정해놓은 '응당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을 뫼르소는 거부한다. 이유는 없다. 뫼르소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러한 과정이 사회의 통념과 맞지 않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 영웅적인 이유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사는 것은 곧 이방인이 되는 방식이었다. 


물론 사람을 죽인 뫼르소의 행위들을 작가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저 뫼르소의 태도와 말을 전하며 독자들에게 판단 여부를 넘긴다. 


뫼르소는 사회의 회유도 경험한다. 신앙, 법적인 처벌, 정서적 당위성 등.

뫼르소는 재판을 받으며 모두를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은 말할 수 없다며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택하고,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기다린다. 

사회의 회유를 모두 거절한 뫼르소는 '어머니가 사망한 날 해수욕을 하고, 난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페르낭델(희극영화)를 관람한 희대의 양아치'가 되어 있었다. 


재판과정은 '아랍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아닌, '어머니의 죽음에도 비상식적인 뫼르소의 태도'에 초점이 맞춰졌다. 재판부는 뫼르소의 태도를 근거로 할 때, 아랍인의 살해 역시도 계획적 살인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회에서 이방인은 소외 당하거나 배척 당한다. 

뫼르소는 기독교를 믿지 않았고,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아랍인의 죽음은 이미 그들에게 논외였다. 

뫼르소의 사회는 뫼르소를 배척하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뫼르소는 그 결정에 대해 분노를 쏟아놓는다. 

사형이 결정되고 사제가 그를 찾아왔을 때 뫼르소는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고 고함을 지른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잇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뫼르소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 삶을 똑바로 쳐다보게 된다. 

그는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라며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추가적으로 정말로 이방인은 '아랍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보태본다. 

아랍인은 일종의 치정싸움에 휘말려 총을 맞고 숨진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살인자 주인공은 재판에 회부되지만 재판에서는 그의 죽음, 그의 살아온 배경, 피해자의 안타까운 사정 등은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모든 재판부는 가해자가 얼마나 사회적이지 못하고 비인간적인지를 파헤치기 바쁘다. 

소설이 끝나는 장까지 우리는 죽은 아랍인의 이름조차 모른다. 

사회가 정한 이방인의 기준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 깊은 고전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항상 제목을 정하기가 힘들어 고민하는데 고전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참 간결하게 핵심을 전달할 수 있는 제목들이 많다는 것. 

물론 시대가 흘러 많이 변한 가치도 있겠지만 인간을 조명한 고전은 역시 변화가 느껴지는 것 같지는 않다. 

다음 번에는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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