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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Feb 11. 2021

잊고 살았던 것들이 잠에서 깨는 시간

영화 소울(2020)

좋아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파리에서 먼저 영화를 봤다며 연락이 온 진은 '디즈니답다'는 총평을 내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았으면 했다면서. 내 총평도 비슷하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나 스릴은 없어도 어쨌거나 마음은 울렁거린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장 많이 건드린 것은 영화 내내 비친 뉴욕 길거리와 재즈 음악이었다.


실제 뉴욕을 실물처럼 재현한 영화는 아스라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큼직큼직한 건물 사이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하철을 배회하는 지친 얼굴들. 철저한 관광객의 입장으로 다녀왔던 뉴욕은 실망스러운 도시였다. 길거리는 더럽고 냄새났다. 나보다는 한 뼘이 넘게 큰 사람들이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 휙휙 지나쳐갔다. 멋 모르고 사진을 찍었던 타임스퀘어 앞 스파이더맨에게는 3달러를 빼앗겼다. 나는 뉴욕에 도착한 지 약 3시간 만에 뉴욕에 질렸다.


'뭐 이런 불친절한 도시가 다 있어'


뉴욕의 첫인상은 그랬다. 슈프림과 팔라스 앞에서 줄을 서서 모자를 사고, MOMA에 가서 전시를 보고, 길거리에서 할랄 가이즈를 먹고 첼시마켓을 갔다. 여행 기간 내내 뉴욕에서는 '다시 오고 싶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여행 마지막쯤에야 나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하나 찾았다.



재즈바 근처에 있는 가게들에는 사람들이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신다.



한 재즈바였다.


멋들어진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밖에서 곧 공연을 시작한다며 손짓했다. 어둑한 지하로 내려간 곳에는 이미 절반 정도 사람들이 차 있었다. 나는 이름도 잘 모르는 칵테일을 시키고 어설프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공연 직전이었던 모양인지 이미 밴드는 악기 앞에 서 있었다. 밴드는 중년의 남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사람들은 눈 앞에 서 있는 밴드보다는 일행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밴드는 입을 열었다.


"Welcome to Newyork, folks!"


호탕한 보컬의 환영인사와 함께 쾌활한 피아노 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곧이어 끼어드는 기타, 베이스, 그리고 트럼펫 소리까지 곡 하나가 순식간에 시작됐다. 나는 기타리스트의 향수 냄새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자리에서 처음 뉴욕의 재즈를 만났다.



아직도 이 때 마셨던 칵테일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마시고 있던 이름 모를 칵테일은 씁쓸하고 독했다. 밴드 연주자들의 앞에는 어떠한 악보도 없었다. 가끔 소리가 어긋나도 가사를 까먹어도 별로 상관없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일행 쪽으로 건네진 탬버린을 얼결에 부여잡고 열심히 박자를 맞추기도 했다. 곡이 쌓일수록 밴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유명한 밴드도, 유명한 재즈바도 아니었지만 연주 내내 두근거렸다.


마지막 곡을 앞두고 우리는 지하철 시간 때문에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떠났지만 안에서는 열심히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부푼 가슴을 안고 타박타박 숙소로 걸어갔다. 손끝까지 가끔 찌릿거렸던 꽉 찬 음악을 기억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재즈바 하프 노트, 뉴욕 스트리트는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것들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나는 재즈를 하면서 이렇게 공연을 하는 날만 꿈꿔왔어요. 그런데 막상 그날이 오니까 내가 생각했던것과 달라서 혼란스럽네요."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누군가에게는 바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바다는 어딘가 다를 것이라는 어리석음이 때때로 더 위로가 될 때도 있다.


나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현실에 순응하는 모순적인 인간이다.

주인공 조처럼 이상만을 좇아 정규직 자리를 포기하고 멋진 밴드의 일원이 될 수도 없고, 22번처럼 단풍나무 잎이나 자그마한 실타래 하나로 세상에 고마움을 느끼는 낭만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 사이,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던 검은색 그림자들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까.


검은 모래를 뒤집어쓴 영혼들은 인생의 목적성을 잃고 무의식의 세계를 떠돈다. 무언가에 심히 집착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된 상태다. 영화 속에서 한 펀드매니저는 문윈드와 친구들 덕분에 집착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소리 지른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올까라는 고민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소설가라는 꿈은 잠시 서랍 속에 넣어뒀다. 덕분에 지금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칠까 봐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다. 요즘은 스타트업 대표들을 자주 만난다. 취재를 하는 동안 대부분 그들이 이야기하는 창업 시작의 계기는 정말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뻔한 방청객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질문을 하는 날이면 집에 오는 내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너무 현실적인 면을 들이미는 사람이 된것만 같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따뜻하긴 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한국어 대사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와 시선을 교환하기도.


영화는 '삶에는 큰 목적이 없어도 된다'며 굳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냐고 물어본다. 물어보는 방식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마음에는 약간의 삐딱함이 생긴다. 네가 뭘 아느냐고. 어줍잖은 위로를 하지 말라며. 아마 내 영혼은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비관의 방', '변덕의 방' 등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닐까.


영화는 으레 교훈이 있는 애니메이션들이 그렇듯 내 일상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려 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맙게도 잊고 살았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두고 기다렸지. 여행에 대한 즐거움이나, 서툴게 밟았던 미국 땅에 대한 그리움들. 나는 영화를 보고 몇몇 장면을 곱씹으면서 내 예전을 돌아봤다. 그리고 잊고 살았던 것들, 그리운 것들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두드리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지금도 나는 아직 나랑 친해지려면 멀었다. 그런데다가 기억력은 좋은 편이 못 돼 매번 까먹는 것들이 있다. 긴 잠에 빠져있던 기억들이나 감정들은 생소할 정도로 낯선 것들이 되어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기억들 사이에 앉아서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을 되돌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뉴욕에서의 기억으로는 며칠이나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욕에 대한 그리움은 언젠가 뉴욕에 다시 가리라는 목적으로 행복하게 살 시간을 더 연장할 수도 있겠다. 바다가 없더라도 바다를 찾아서 가는 동안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잃어버릴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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