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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Mar 14. 2021

가족은 '구원'이 될 수 있나

미나리(2020)


포스터에는 따뜻한 색감 속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틀포레스트와 같은 잔잔함을 기대하면 실망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마음이 뒤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판타지가 가미되지 않은 지극히도 현실적인 가족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온 후에 검색해  미나리의 후기는 '따뜻한 가족 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그저 따뜻한 가족애,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가족을 구원삼아 역경을 디뎌내는 영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층 쓸쓸해진 마음으로 돌아왔다.



서로를 구해주자고 약속했던 부부는 서로를 잡는 덫이 됐다. 가족은 구원이 될 수 없다.

아이들을 위해 도시로 가고 싶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로서 한 번의 성공이 절실한 남편은 등을 돌려대고는 다른 곳으로 서로를 잡아 이끈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아픈 손가락이다. 가정의 무게를 짊어지고 무리한 도전을 하는 전형적인 가장, 그리고 희생적인 아내, 일찍 남편을 잃고 나서 아이들을 봐주기 위해 딸의 집에 오는 외할머니까지. 어느 하나 익숙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가족을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모니카는 그냥 가족이 함께 있으면 안 돼?라고 묻지만 제이콥은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이콥은 누군가와 지독히 닮은 말을 했다. 한 번이라도 애들한테 성공한 아빠이고 싶다는 말을 한다. 결국은 그것은 당신의 욕심이 아닌가요.

나는 제이콥에게 내내 되묻고 싶었다. 우리는 성공한 아버지를 원한 적 없다. 누구도 당신의 어깨에 그런 무거운 짐을 지워준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제이콥을 보며 안쓰러움과 원망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시선을 앗은 것은 앤 이다.  

가족의 우선순위는 아픈 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아프고 나서는 할머니 순으로 배정된다. 부모님의 관심 역시도 할당량이 있다. 앤은 혼자서 자랐다. 앤은 또래에 비해 꽤 어른스러운 편이다. 돌발상황이 생겨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엄마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교회로 간다. 엄마가 없을 때는 장녀가 엄마다. 늘 맏이는 빨리 큰다. 눈치를 보고, 환영받지 못할 이야기는 삼키고 억지로 '어른스러운 아이'로 바뀌어 자란다.  극 중 앤 역시도 그랬다.



"우리 딸 많이 컸네."


아슬아슬한 가정에서 결국 엄마가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다. 도리어 엄마를 위로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는 저 아이가 엄마에게, 아빠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무게를 얼마나 짊어지고 있을지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동생에게 '너는 엄마랑 살 거야, 아빠랑 살 거야?'라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혼자 우는 날이 많았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번도 울지 않는 아이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을지 자꾸 걱정이 돼 기웃거리는 마음이 됐다.


딸네 집에 와 아이들을 봐주다 몸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 몸을 움직인다. 불편한 몸이 되레 설거지 거리를 엎고, 물을 쏟고 급기야는 사위가 일 년을 고생해 일궈낸 채소 창고를 불태우는 비극까지 치닫지만 아무도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늙고 병드는 것이 죄가 되는 순간들 앞에서 순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나는 결국은 거기서 몸이 떨릴 만큼 울었다. 가족에게 불어닥친 일상 같은 불행함은 사람을 하여금 너무 무력하게 만들었다.



미나리.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란단다. 물가에 뿌리를 내리면 어느새 군락을 이루고 그 물가를 제 집처럼 덮어버릴 만큼 생존력이 강하다. 무던하게 뿌리를 내리고 물가에서 자라나는 그런 미나리는 공통점 하나 없는 배척의 땅에서 뿌리내리는 제이콥의 가족을 투영한 거라는데.


나는 영화에서 생존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영화는 그냥 버티고 하루 기쁜 날, 하루는 절망적인 날. 그런 날들이 엎치락뒤치락 반복되며 어떻게 '살아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희망을 주지도 않는다. 그냥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로 희망을 찾기에 가족의 절망은 너무 멀리까지 왔다. 언젠가는 해체될지도 모르는 가족은 아슬아슬하게 다시 서로의 손을 부여잡는다.


영화는 막이 내릴 때까지 입바른 소리는 미뤄둔 채 묵묵하게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만 한다. 영화를 마치고 사람들의 표정이 각기 다른 것은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내 옆의 중년 부부는 영화 중반부부터는 계속 눈물을 삼켰다. 내 앞자리 사람은 코를 골며 졸았다.

영화가 끝나도, 영화와 닮은 내 삶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겠지만 사람은 비겁하게도 비슷한 사정의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고 하던가. 나는 가족이 구원이 되는 아름다운 세계에는 살지 못해도, 여전히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믿는 사람이어도. 아름답지 못한 결론의 영화는 오히려 내 옆에 앉아서 '그래, 네가 특별하게 불행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고 어설픈 위로를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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