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플리(1999)
미뤄뒀던 영화를 봤다.
리플리. 리플리 증후군의 그 리플리란다.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의 내용을 영화한 것이라고 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허구의 세계를 진짜로 믿고 상습적으로 이루어진 거짓의 세계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리플리는 거짓말로 살아간다. 이름 말고는 진실인 게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는다. 왜일까. 자신만만해 보이는 말투와 흔들림없는 표정, 그런 것들이 그를 믿게 만든다. 거짓말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내내 하는 리플리의 거짓말은 화면밖의 나조차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고 침착했다.
우연한 거짓말이 가져다 준 행운은 너무도 달콤하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재벌의 아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은 톰 리플리는 자신이 평생 겪어보지 못한 상류층 사회에 녹아들게 된다. 리플리는 천천히 디키를 보고 상류층의 문화와 행동들을 배운다.
관찰, 관음
리플리의 시선은 이 어딘가에 멈춰있다.
리플리는 언제나 디키를 보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경이거나 로맨스의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리플리의 시선이 디키과 그 주변을 관찰하듯이 뒤덮고, 되뇌고, 끝내는 따라하는 순간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동경은 모방을 결과로 두니까. 카메라 넘어 리플리의 시선을 내가 정면으로 받는 순간이 오는 순간 알았다.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눈빛과 모든 행동을 샅샅이 훑는 눈빛은 가끔 너무 들끓고 번득여서 소름이 끼쳤다. (배우의 연기가 정말 굉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디키가 그 눈빛의 위험함을 늦게 알아챈 이유도 알았다. 선망,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에게는 리플리의 눈빛은 낯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들여다 봤다면 그 내면에 들끓고 있는 욕망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은 하다보면 는다.
거짓말로 일어난 것들을 살리는 것은 또 다른 거짓말이다. 그리고 리플리는 그것을 해낼만한 대담함도 있다. 리플리는 재치있게 상황을 만든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거짓말쟁이는 매력적이다. 실제로도 나는 리플리가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농담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이 속아넘어갈 수 있도록 그럴듯한 판을 짠다. 사람이 둘이나 죽었는데도 그의 말을 모두가 믿는다.
Who are you?
그것은 정말로 당신의 삶인가. 당신은 불행하지 않은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그의 뻔뻔한 거짓말과 끔찍한 범죄 끝에 리플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 네가 디키를 죽인거라 비명같은소리를 지르는 마지의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는 약혼자를 잃었고 충격이 크므로 아무나 원망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것이 이유였다. 자, 그럼 마지도 떠났다.
후련했어야 맞지 않나. 그러나 마지막 살인 끝에 침대에 걸터앉은 리플리는 슬퍼보였다.
피터를 살해하며 흐느낀 모습은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끈덕지게 리플리의 얼굴을 담으며 멀어지는 카메라가 그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리플리의 마지막 살인은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났다고 느껴진다.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피터까지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리플리로 남아있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포기했으니까.
거짓으로 쌓아올린 바닥은 솜사탕 같다.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바닥이 폭삭 주저앉을만큼 나약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 이유는 아마 그만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던 그 순간순간에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은 우아하지 않다. 리플리가 그 방증이다.
시카고에서 살인도 예술이라는 말을 들었다. 살인도, 살인범 리플리도, 그가 동경했던 디키와 모든 사람들까지도 뒤에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영화 내내 비춰지는 여름의 이탈리아는 너무 아름다웠다. 극적인 죽음도.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주인공은 그 거짓말을 업은 최후가 어떨지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참고로 잔인한 장면이 꽤 나와서 잔인한 것을 싫어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