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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an 08. 2021

노래가 멈췄다고 춤을 멈출 텐가요

첫 번째 비정기적 우편함


맹숭맹숭하게 2021년이 시작됐다. 

1월이라고 하기는 아쉬우니 제멋대로 13월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혹은 12월 36일 정도. 


찬 바람이 불면 나는 기억들이 있다. 별 거 아닌 것처럼 지나쳤다가 갑자기 기억 위로 반짝 솟아오른 순간들. 오늘은 그런 순간 중 하나를 꺼내보고자 한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갔을 때였다. 내가 머물렀던 곳은 조용한 도시였다. 동네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는 두 군데뿐이고 저녁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종종 학교 친구들을 마주치고 차로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시골에 가까운 작은 도시 커니. 



떠나는 날이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남았을 때 나는 혼자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그 해는 늦게까지 가을이 버티고 서 있었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랬는데, 거짓말 같이 해가 쨍쨍 내리쬐는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따가운 초겨울 햇빛이 목덜미를 태우다가도 쌀쌀한 바람이 쌩하고 지나가며 머리를 들쳤다. 공원을 가득 채운 나무들은 붉게 물든 잎들을 무겁게 매달고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을 하나 둘 떨구고 있었다. 



공원 구석의 벤치에는 가끔 마주쳤던 남자가 앉아있었다. 남자는 항상 헤드셋을 목에 걸고 있었다. 스피커를 벤치 책상에 올려두고 길게 드러누워있을 때도 있었다. 남자는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뭔가를 적던 일에 열중했다.  






나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케치북을 펼쳤다. 띄엄띄엄 그려진 그림과 글들로 빼곡히 찬 스케치북은 반이 넘게 미국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떠나기 전 무슨 이야기들로 채워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남자의 스피커에서 나오던 음악이 끊겼다. 나도 덩달아 펜을 멈추고 남자 쪽을 건너다봤다. 남자는 스피커를 톡톡 쳐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그리고서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You don't have to stop dancing even if the song stops."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스피커를 두고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나는 스케치북에다가 문장을 하나 적었다. 


노래가 멈췄다고 춤을 멈출 텐가요.


노래가 멈춘다고 춤을 멈출 필요는 없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그 문장 옆에다가 몇 가지 단어를 적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 순간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되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내가 일어나 공원 입구를 벗어날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는 스피커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찬바람이 섬칫하게 부는 날이면 그 날 남자가 던졌던 말이 왕왕 생각난다. 


작년 가을은 유독 잔인한 계절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이 한순간에 낯설게 변했다. 매일 눈 뜨는 것이 힘겨웠다. 하루 아침에 냉담하게 등을 돌린 세상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회피였다. 


나는 침대 밑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눈을 떴다. 집에 오면 무거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몰래 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해가 뜨면 출근하고 일이 끝나면 잠을 잤다. 


잠을 자며 모은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늘 쓰던 일기도 멈췄다. 


기록하고 싶은 일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는 그 기간을 공백으로 남겼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앞으로도 내가 넘어야 할 수많은 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겪었던 이 거대한 산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혹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기록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든, 자랑스럽지 않은 이야기든 나에 대한 것들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남자가 건넸던 말을 달력 맨 위에다가 적었다. 



노래가 멈췄다고 춤을 멈출 텐가요. 



노래가 멈췄다고 춤을 멈출 필요는 없다. 노래가 멈춰도, 발이 꼬여도, 넘어질 것 같아도 용기 내어 다음 스텝을 밟읍시다. 노래가 없으면 길거리 소음을 따라서나 길바닥에 부딪히는 내 발소리를 따라서도 괜찮아요. 조금만 더 걸어봅시다. 어쨌거나 인생의 음표는 나 아니겠습니까. 


13월을 맞이하며, 유수풀 올림


스텝이 꼬이면 그게 바로 탱고 라오!

- 여인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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