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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an 15. 2021

올해는 바다가 얼었다

비정기적 우편함

올해 겨울에는 바다가 얼었다.


인천 앞바다가 꽁꽁 얼었단다. 한강에는 유빙이 떠다닌다. 집을 비운 사이 얼어버린 싱크대에서는 며칠 동안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육지까지 떠밀려왔다가 바위를 붙들고 그대로 얼어버린 바다의 사진들도 받았다. 한국에 몰아닥친 낯선 추위의 소식을 친구에게 전하는 동안 나는 늘 그리운 여름 바다와 K를 떠올렸다. 

 



여름에는 바다에 안기고, 겨울에는 바다와 함께 걷는다.


나는 줄곧 1년을 그렇게 보냈다.



여름에는 달리는 차 창문 너머로 푸른색 넘실거림이 보이기만 해도 벌써 가슴이 벅차다. 코 앞까지 밀려온 바다의 짠 냄새가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다.


바다를 코 앞에 두고서는 대충 몸과 짐을 푼다. 그리고서는 첨벙첨벙 바다 안으로 뛰어든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물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싶다. 해가 머리 끝에 있을 때면 바다마저 미지근해진다.




바닷물에 지워진 선크림이 얼룩덜룩하게 등을 태우고 서투른 수영 탓에 잔뜩 먹은 바닷물에 입 안이 깔깔하다. 파도에 실려다니다 지칠 때쯤 뭍으로 나온다. 제 발로 걸으려니 몸이 무거워 그냥 모래사장에 등을 대고 누워버린다.


머리카락과 모래가 한데 엉겨 붙는데도 아랑곳 않고 햇볕이 몸을 말려주는 기분 좋은 느낌에 집중한다. 눈을 감으면 사람들이 웃는 소리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소리,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들이 더 선명하게 흘러들어온다.




떠날 시간이 되면 못내 아쉬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들어갔다오자며 주변을 꼬드긴다. 결국 신발을 다시 내려놓고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면 금세 식어버린 서늘한 바다가 철렁하고 나를 안아준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바다의 기억은 이렇게도 전형적이다.




겨울바다는 그림의 떡이다.



바다의 찬 공기를 실은 매운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흩어버리는 동안 나는 바다를 우두커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난겨울에는 갔던 제주와 속초를 갔다. 바다는 지독하게 파란빛이 돌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오징어 배의 불빛이 눈이 부신 건지 바다가 너무 푸르러 눈이 부신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겨울 밤바다는 사람을 홀린다더니 짙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곳에서 나는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렀다. 아쉬운 마음에 바다에 손을 뻗으면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바다가 손 끝에 닿는다. 이렇게 차가운데도 바다는 얼지 않는다. 나는 힘차게 출렁이는 겨울바다의 파도를 내려다 봤다. 나는 바다가 언다면 언 바다 위를 하염없이 걸어가고 싶다. 더 이상 걸어 나가지 못하는 끝에서야 걸음을 멈추겠다. 그리고 몰려오는 파도 앞에 나는 장렬히 부서지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udngnk 님이 담은 얼은 바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바다를 보러 간다. K와는 종종 바다를 보러 갔다.


K는 바다에 있는 시간을 대부분 싫어했다. 소금 냄새가 비리고 다녀오면 신발에 모래만 가득 차 있다는 등의 전형적인 이유였다. K는 내가 바다가 가고 싶다고 할 때면 짧게 한숨을 쉬고 차 키를 집어 내밀었다. 운전은 내가 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K는 주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내가 차를 세워놓고 바다를 구경하는 동안 K는 휴대폰을 보거나 의자를 뒤로 넘긴 채 잠깐 쉬곤 했다. 나는 모래사장을 천천히 거닐며 바다가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은 팔을 걷어붙이고 해변에 모인 자글자글한 돌멩이나 조개 따위를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여유가 있다면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감각들을 하염없이 느끼기도 했다.




- 파도 소리 너무 좋지.





K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바다가 얼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고 K 역시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종종 바다를 보러 갔다. K와 나는 그 해 겨울에 헤어졌다. 



그 해 겨울에는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3월에 눈이 내린 이상한 계절이었다. 바다가 얼지도 않았는데 사랑이 끝났다. K의 바다는 먼저 얼어버린 모양이었다. 계절감을 잃은 눈을 맞으면서 한 번, 그리고 인천 앞바다가 얼었다는 거짓말 같은 소식 속에서 한 번, 나는 K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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