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말린 척추가 물고기뼈처럼 솟았다

여름이 온다

by 유수풀


벌써 8월이 다 갔다. 등에는 땀이 흐른다. 비척비척 걸어가던 걸음 속에서 웃옷을 성의 없이 두어 번 펄럭거리고는 걸음을 멈춘다. 곧 은이의 생일이다. 입맛이 없다. 정신없이 걷던 중에는 몰랐던 매미소리가 귓가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집에 먹을 것이 있었나. 장을 보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정수리를 쏘았다.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는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뜨끈한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몇 번 쓸어내린 다음 장바구니를 든다. 장바구니를 들자마자 은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린다. 수박 사자 수박. 손도 많이 가고 음식물 쓰레기도 많이 나오는데 그걸 왜 사.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수박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들기던 나의 애인.

나는 과일 코너 앞에 선다. 사람 머리통만한 수박이 이리저리 멋대로 쌓여있다. 어떤 게 맛있을지는 모른다. 맛이 어떻든 상관없다. 나는 수박을 싫어하니까. 처음부터 수박을 좋아해서 먹은 기억은 없다. 나는 은이가 골라온 수박만 먹었다.


은이는 어떤 수박이든 잘 먹었다. 여름인데 수박을 안 먹으면 여름 같지가 않아. 같은 뻔한 말을 종알거리며. 내가 수박을 자르는 동안 은이는 내 등 뒤에 볼을 꾸욱 붙이고 서 있었다. 나 칼 들어서 위험하다니까. 나 위험하게 안할 거잖아. 나는 대답을 않는다. 은이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듬성듬성 잘린 수박을 몇 번이고 썰어줬을까. 은이는 썰어주는 족족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네가 썰어주는 수박이 제일 맛있어 따위의 말을 읊었다. 하나도 고맙지 않다. 은아 나는 네 사랑이 무거워. 나는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에 그런 말들을 숨겨서 조각조각 도륙 내어 버렸다.

내 등 뒤에서 숨을 쉬던 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제와 궁금하다. 그때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뒤에서 느껴지는 몸의 온기가 축축하고 지나치게 따뜻해서 가끔씩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잘라놓은 수박도 있는데 왜 그거 샀어.

툴툴대는 내 목소리 옆으로 불쑥 포크가 들어왔다. 잠자코 입을 벌리는 내 옆에서 은이는 그냥 하고 웃었다. 웃으면 다냐. 다다. 유치한 물음 끝에는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침묵을 한 번도 무겁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도 무겁다. 천장에서 덜걱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침묵을 던다.



오래된 수박은 공기 중에 시뻘건 수분을 죄다 뱉어내고 마른 살갗을 드러내고 운다. 은이야 왜 이렇게 말랐어.


나는 은이가 내민 수박을 입에 넣는다. 입에 넣자마자 입가로 주르륵 흐를 만큼 물기 도는 수박과는 달리 애인의 팔뚝은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싹 말랐다. 은이는 계절이 바뀌니까 그렇지 하며 능청스레 잡힌 팔을 뺀다. 그래서 마른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입을 다문다. 물어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또 다시 침묵이 무겁게 깔린다.


은이는 늘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괜히 은이 앞에서는 멋없게 몸을 부풀린다. 괜찮아, 나만 믿어. 금이 가 있는 바닥에 선뜻 발을 내딛을 만큼 멍청하지 않은데도 은이는 기꺼이 내 손을 잡는다. 우리는 금방 깨질 설탕조각 같은 바닥 위에 선다. 한 명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바로 바닥이 무너질 텐데도 우리는 대담하게 서로의 손만을 붙잡고 그 바닥을 발로 굴렀다.


동그랗게 말린 척추가 물고기 뼈처럼 솟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그런 뼈를 나는 힘주어 주무른다. 내 손에서 부서지기라도 할 것 마냥 여린 뼈가 힘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은이가 추락하는 걸 보고도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구하고 싶지 않아. 누구도 내 탓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은이는 그토록 원하던 형태로 생을 마감했고, 아무도 그 속에 내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은이의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모두들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웅성대는 목소리를 모아 땅에 파묻고 싶었다. 그냥 다 뒈져버리라지. 뭘 안다고 안타깝다는 거야.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염치로 거길 가니. 나는 웃고 있는 영정사진 밑에서 울 자신이 없었다. 숨을 쉬지 않는 네가 무섭다. 나는 병풍 뒤의 네가 뛰쳐나와 내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납골당에 다녀오면 며칠을 앓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원망이라도 해. 침묵이 길다. 나한테 내리는 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지 않니. 나는 또 다시 너를 탓하며 이불 위로 풀썩 송장같은 몸을 쓰러트린다.


벽에 아슬하게 기대 있던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다 삭아 문드러진 수박껍질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열에 흐릿해지는 눈을 억지로 뜬다. 쓰레기 봉지 안에 잠들어 있던 초파리들이 포르르 날아올랐다가 다시 수박껍질 위로 내려앉는다.


은아, 나의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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