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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Sep 22. 2021

밤은 외롭고 시간은 느려요

비정기적 우편함

수첩을 쓰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제멋대로 굴러도 망가지지 않고 아무 때나 볼펜 하나만 짤깍대면서 글을 써도 되는 수첩으로. 아끼는 수첩이면 결국은 글씨부터 적는 내용까지 하나하나 잘만 쓰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냥 손에 짚이는 제일 싼 수첩으로 샀다. 한 달이 넘었는데 벌써 반이 찼다. 기록하고 싶은 게 많은 건 아니다.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들을 적는 의무의 란으로 바뀐 것 같아도 적는 것은 계속하고 있다. 적어야 잊지 않고 잃지 않는데. 사실은 이제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둔해지는 건 슬프다. 예전에는 이만한 일에는 슬펐고 눈물도 났고 은정이를 붙잡고 내 인생은 왜 이따위냐고 술이나 퍼부었는데. 대학 때는 잔디 위에 앉아서 새벽을 셌다. 역병이 돌아 새벽 시간을 뺏긴 것에 적응한 것일지, 정말로 내가 단단해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려니 하는 편이 쉽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은 덮고 그 위에서 줄넘기를 하면 돼. 흙먼지가 날리고 나면 다른 풍경이 나오겠지,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사는 것만 여전하다. 은정이는 이제 연락하지 못하는 친구가 되었는데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서로 닦아주던 눈물은 가끔 생각이 나는데. 


나와 사이가 멀어진 사람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야 따끔거리는 감정을 느끼는 때가 많아졌다. 요새는 힘들면 딴 얘기를 한다. 눈물은 전염이 안 될까. 역병보다 진한 게 우울감이라면 마스크 대신에 안대를 쓰면 안 될까요. 모두가 해피치즈스마일 그런 분위기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얼마전에는 정인이를 붙잡고 아이처럼 울었는데 다음 날은 그런 일이 없었던 척 했다. 정인이도 내 눈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체 했다. 어깨를 붙들고 울어서 온통 얼룩진 회색 티는 세탁기에 들어가고 나는 정인의 방에서 오래오래 잤다. 그러고 나면 세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담배를 끊을 생각을 끊는 편이 좋겠다는 말이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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