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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an 28. 2022

표준으로 줄 서기

비정기적 우편함


1. 연희동에서 아현이랑 새해를 맞이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그때 그런 말을 했다. 요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정신으로 사는데 아현이 그걸 다 기록을 해놨더라. 그래서 그대로 가져왔다.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작정 나와서 걷다가 그런데 또 사람이 많으면 불안하니까, 골목 같은 곳에 들어가서, 뭐가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신기하게 안심이 돼.”     


작년에는 종종 불안증이 도졌다.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분명 아무 일도 없는데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냥 도망치는 거야. 집이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로부터 도망치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집을 나와서 사람들 사이에 섞인다. 웃긴  사람들이 많으면  무섭다는 거야. 그래서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나를 달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두려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이것저것 충동적으로 구매를 하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집은 다시 안전한 장소가 된다. 공황장애인  병원에서 알려주더라.


2. 몸살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항상 꾸던 악몽이 있다. 나는 어느새 꿈 안에 있고 주변은 온통 하얗다. 유체이탈을 한다면 아마 그런 느낌일 것이다. 내 시야가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는 느낌. 그러나 발은 여전히 땅에 붙어있다. 그렇게 점점 시야가 멀어지면서 검은색 동그라미 두 개가 보인다.


아직까지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꾸준히 내 시야는 바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누군가의 얼굴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검정 동그라미가 데구루루. 굴러서 내 눈과 딱 마주치는 순간 꿈에서 깬다. 그리고 대부분 이 꿈을 꾼 날은 심하게 앓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꿈의 영역도 약해지는지, 이제는 그 얼굴과는 마주하지 않는다.      


3. 우울한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그 말에 왜 즉각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집에 와서도 계속 그 말이 맴돌았다. 반박할 필요는 없었는데. 음악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울한지 아닌지는 사실 내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그냥 그때 우울했던 것 같아. 하고 말았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기 싫어. 그래서 아마 그 말이 계속 발목을 부여잡은 게 아닌가. 부정적인 평가는 힘이 세서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그대로겠지만, 나는 너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됐든 마음에 콕 박힌 그런 평가들은 시간이 지나도 빠지지를 않아. 박은 대체로 내 음악 취향이 좋다고 했다. 너는 뻔하고 또 뻔하지 않은 것들을 좋아해. 그런 좋은 평가들은 힘이 없나. 살면서 느낀 점은 좋은 것들은 대부분 타이밍을 맞추는 능력이 없다는 것. 지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4. 그때 나 왜 좋아했냐고 물어봤다.

어차피 넌 내 글은 읽지 않으니까 여기까진 안 오겠지만. 혹시나 본다면 민망하니 지워버려야지. 그냥 그때는 누군가를 맘껏 좋아하고 싶었는데 하필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응 그랬구나. 하필이라는 말이 좋았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고 웃으니까 정이도 그러게, 널 좋아해서 나도 좋았어. 그랬다.      


5. 엄마가 올해 내 신년 운세를 보고 사랑을 조심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오타인 것 같아서 사람을 조심하라는 거야, 사랑을 조심하라는 거야. 물어봤다. 엄마는 둘 다라고 답했다.      


6. 요새는 술을 먹으면 전화를 자주 한다. 20대 초반에나 그랬던 주사가 기승이라 술이 깨고 나면 부끄럽다. 아무래도 술 먹으면 폰을 꺼버려야겠다.      


7. 1월 28일인데 죄다 반올림해서 벌써 2월 하자. 2월은 며칠 더 짧으니까 1월이 인심 써도 괜찮지 않나.  


8. 일주일 간격으로 동쪽의 바다랑 서쪽의 바다를 봤다. 오이도. 강릉. 오이도의 바다는 너무 까매서 하나도 바다 같지 않았다. 허술한 펜스를 보고서 뭐야 뛰어들어도 아무도 모르겠다 하고 아현과 웃었다. 오이도에서는 한 해에 몇 명의 사람이 죽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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