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1998)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니.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 갈림길에서 미술관을, 동물원을 선택하는 둘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또 그 다른 이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채로 옆에 딱 붙어 있는 모양새가 서툴고 귀엽다. 춘희와 철수의 서울 사투리에 귀가 즐거웠다. 꼬박꼬박 문장을 올려 말하는 말투가 귀여워서 몇 번 따라도 해봤다. 조금 뿌연 화면에 지금 내가 아는 배우들의 젊은 모습이 차 있는 것도 낯설고 풋풋하다.
휴가를 내자마자 정신없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엉망인 애인의 방을 치워주는 철수. 집을 비운 사이에 제 집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낯선 남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들을 이어가는 춘희. 서로의 사랑을 흉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꼭 붙어 앉아 떠드는 두 남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의 당연한 공식처럼 둘의 중심 서사도 사랑이다.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법도 달라서 더 어렵고 재미있는 그런 사랑.
응, 요즘 사랑은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듣는 꼴 같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다 내주지 않는.
그때 사랑이나 지금은 다 똑같은가 보다. 지금도 나한테 사랑은 그렇게 느껴진다. 늘 솔직한 사랑을 부르짖으면서도 단 한 번도 완전히 솔직해져 본 적이 없다. 솔직한 건 어렵다. 나는 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이 사람을 위한 다른 모습을 꾸며내야지 돼. 내가 가지고 살아온 28년간의 모습과 이 사람이 내게 기대한 모습이 얼마나 일치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하는 것 같다.
손은 잡고 있는데 각자 온도가 너무 달라서 결국은 축축하고 차가워진 손이라든가. 눈을 보고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벼운 질문들이라든가. 그런 ‘다름’을 맞이할 때 멈칫거리는 감정이 오히려 익숙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각자의 에어팟을 끼고 노이즈캔슬링까지 해서 서로의 목소리도 막아버리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항상 몇 년 뒤에 내 나이를 생각해보면 끔찍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됐을 때 담담할 수 있는 건 나이를 한 살씩 먹어서인가 봐. 그럼 그다음 나이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거든. 평균 수명이 길어졌으니까 철도 그만큼 늦게 드는 거야 모두.
나이를 한 살씩 먹는다는 표현이 너무 좋았다. 일 년 동안 다음 해를 준비하고 또 다음 해가 오고. 시간만큼 공평한 게 없지. 모두한테나 같은 비율로 다가오지 않나. 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2살씩 먹을 수도 없고, 느리게 먹겠다고 0.5살씩 먹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서른이 되는 것은 내게 끔찍한 수준까진 아니어도 겁이 나는 나이이긴 한 것 같다.
넌 잘 나가다가도 꼭 퍼즐 마지막이 모자란 사람 같더라.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거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지는 몰랐어.
- 야 저기 네 거랑 똑같은 신발 있다. 그치?
- 처음 봤을 땐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지금 보니 왠지 초라해 보이네
- 그건 그 신발을 지금 신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 외에 좋았던 구절들.
춘희가 꿈꾸듯이 말하면 철수가 어림도 없다며 이내 현실로 끌어내리는 말들도. 춘희가 나는 안 될 거야 자조하면 옆에서 아니, 내 말이 맞아 당당하게 춘희를 다독여주는 말들도. 잔잔하게 위로가 됐다. 마지막에 철수를 만나러 동물원에 간 춘희도, 춘희를 만나러 미술관으로 간 철수도. 그냥 폭탄 같고 불같은 사랑이 아니더라도 서툴게나마 손을 잡아보기로 결심한 둘의 연애는 덮어놓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래오래, 싸워보며 찬찬히 잘 사귀어보거라! 이렇게.
+ 아쉬운 게 있다면 철수의 캐릭터성 정도. 지금 시기에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들은 아마 철수의 손찌검이나 윽박지름에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그 장면들을 별로 두둔하고 싶진 않다. 한편으로는 철수의 서투름을 더 부각하는 요소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도 춘희가 움츠러들 때는 나도 같이 움츠러들 정도로 소리가 많이 크다. 다시 본다면 이 부분을 잘라내고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