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온다
1. 배고파. 그러게. 어떻게 좀 해봐.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연지의 뒷모습이 미워서 엉덩이를 빵 차고는 다시 침대 안으로 도망친다. 아니나 다를까. 연지는 이불 안으로 숨은 유진을 추격하러 침대 위로 뛰어든다. 이불 안은 유진이 날뛰며 뱉은 후텁지근한 공기로 가득 찼다. 연지는 유진이 움직이지 못하게 양쪽 이불을 눌러 잡고 배 위로 올라탔다.
항복해라 항복.
무게를 실어 누르는 압박감에서 문득 사랑을 느꼈다면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걸까. 유진은 연지의 무게가 그리워질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아 알았어 항복, 항복. 웃음이 한참 끊이지 않았다. 그날 밤 유진은 연지의 머리카락이 목을 조르는 악몽을 꾸었다.
사람을 상처 주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연지는 다소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남이 받아줄 수도 없을 만큼 흉포하게 쏟아내며 마음을 할퀸다. 연지의 말을 듣는 사람은 차라리 주먹으로 자신을 세게 한 대치고 싶은 마음으로 그 힐난을 받아들인다. 연지야 그만해. 연지는 그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터져버리기라도 할 듯 데시벨은 높아지기만 했다.
연지가 화를 내는 것은 꼭 폭주기관차 같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연지의 손을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처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을성을 가지고 깊게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가. 그렇게 열 번쯤을 반복하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연지는 유진의 손 아래에서 화를 가라앉히고 주저앉았다. 똑같은 템포로 숨을 들이 마시면서. 폭주기관차가 멈추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멈춘 기차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유진은 연지의 집이었다.
2. 기억이 자주 끊긴다. 잘 쓰지 않는 단어를 기억해내는 것은 눈 한 번 깜빡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족히 하루는 걸리는 것 같다. 혹은 영원히. 어제는 재미있게 읽었던 영화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 열심히 영화 주인공을 설명했다. 영화 주인공을 설명하려다가 그 사람의 이름도 까먹은 것을 깨달았다. 기억나면 알려줄게 하고 넘겼는데 사실은 꾸준히 불안했다.
하하, 디지털 치매가 진짠가보다. 집에 와서 집 청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양치를 하다가 그 배우의 이름이 생각났다. 배우 이름이 생각나니 영화도 찾을 수 있었다. 기억 감퇴는 꽤 많은 병들의 증상이고, 내 병명은 그중에 어떤 것인지 모른다. 병이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확률은 반반. 이불을 덮었는데 겁이 났다. 이러다가 중요한 것들도 깜빡해서 해마 저편으로 넘겨버리면 어떡하지. 나는 무엇을 피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는가. 알 길이 없다. 잠을 자면 전원이 내려간다. 그사이에 지워질 기억이 무엇인지, 내가 이런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지켜낸 소중한 기억은 무엇이 될지. 내가 내일을 기억할 수 있는지 겁이 나던 날이 있었다.
3. 사실은 화해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왜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는 대로 한다고 해서 다 정답은 아니었다.
4. 다현 언니는 가끔 냉정하게 구는 것이 재미있다. 예를 들어 애정을 담아 사진을 찍어줄게, 하면 능력을 담아 찍어. 하는 것들이. 언니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단단한가 싶으면 무르고 화내고 있나 하면 웃고 있다. 첫 만남이 기억난다. 이태원에서 보기로 했고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길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언니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데, 그냥 멋대로 저 사람일 것 같다 하고 그 앞에서 조금 주춤거렸다. 눈 마주쳤었는데,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일행이랑 같이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라 아닌가 보다 하고 지나쳐서 조금 더 걸었다.
어디세요?
저 OO 지났어요.
저 거기 앞인데?
거기서부터는 확신하고 되돌아갔다. 그 사람이구나. 웃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이야기만 나눠봤는데. 나는 무엇을 알고 언니를 확신했을까. 일기를 쓰면서 언니한테 이야기했다. 일기도 보여주고. 언니가 그런데 그거 알아? 나도 너보고 너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말해서 한참을 웃었다.
5. 간밤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그 번호를 알고 있었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숨을 참았다. 모아놓은 숨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전화는 울었다. 진동이 멈추고 나니 빛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부재중 전화 표시가 화면으로 떠올랐다.
상대방은 그 멘트를 듣고 전화를 끊었을까.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음성메시지를 남기든지, 끊든지 알아서 하라는 불친절한 메시지를.
여태 내 음성사서함을 이용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정신없이 술을 마시던 어느 여름이었다. 읽지 않은 음성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이 떴다. 음악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넌... 너는... 씨발 존나...진짜 못됐어. 이태원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나는 그 녹음을 몇 번이나 들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러니까 나는 간밤의 부재중에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