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풀 May 22. 2022

원고지 16매

비정기적 우편함

마감된 글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 A4용지 원고지로 16매가량의 분량을 맞춰주세요.라고 했을 때 16매에 마지막 글자까지 딱 맞게 보내주는 사람, 한참 넘쳐흐르게 보내주는 사람, 턱도 없이 모자란 원고로 다시 한번 연락하게 만드는 사람 등등.


대부분은 인터뷰 때 느낌 그대로였다. 미사여구가 많고 말솜씨가 좋으셨던 교수님은 16매짜리 원고를 32매로 만들어오셔서 나를 놀라게 했다. 말이 좀 길어졌지요 하고 하하 웃으셨다. 대화 내내 뚝뚝 끊어지는 말들을 이어 붙이느라 고생했던 한 애널리스트는 엔터와 스페이스로 이루어진 공백으로 휑한 원고를 보냈다.


편집자로서는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하는데 아마 작업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넘치게 주는 사람이 좋다. 편집 방향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주된 이유가 되겠다. 문장이 넘치면 열심히 유사한 의미의 짧은 단어를 찾거나 접속사를 덜어내면 된다. 문제는 원고가 부족할 때다. 방법은 몇 가지 있다. 사진이나 일러스트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가장 무난한 방법이지만 원고가 부족해 보일 수 있다. 문장을 늘리기. 꽉 맞게 맞춰놓은 다른 부분에 비해 늘어져 보일 수 있다. 정 안될 때는 추가적인 질문을 해 원하는 문장을 더 받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쓸 수도 있지만, 최대한 그런 방향의 편집은 지양하는 편이다. 일을 하다 보면 과감하게 문장을 덜어내거나 리라이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최대한 원 글쓴이의 문체나 단어를 살리면서 비문이나 적절하지 못한 서술어를 고치는 과정이다. 내 편집 과정은 그다지 과감하지도 않다. 바느질하듯 사부작사부작 티 안 나게 고친다. 생각보다 어렵다. 원 글쓴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예쁘게 본떠서 전달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완벽한 타인인 내가 끼어들어 이것저것 문장을 재배열하다 보면 내 취향에 맞는 문장 구조의, 독자인 나를 위해 쓴 글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가끔은 16매짜리 분량을 반올림해버린다.

18매 정도로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선배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배마다 달랐다. 아예 딱 맞춰 받는다는 선배부터 넉넉한 분량을 미리 말한다는 선배까지. 딱 맞춰 받는 선배에게는 분량이 모자라면 어떻게 해요?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커피를 들고일어나려다가 다른 데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어떻게 주세요? 물어본다. 대답이 웃겼다.


딱 맞게 주지!


기자들은 다 그런가 봐. 즐거운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도 외부 원고를 쓸 일이 생겼다. 마감일에 맞춰서 열심히 써간 원고가 마무리됐다. 달라고 한 분량은 원고지 10매. 문서정보를 펼쳐 확인한 내 분량은 10.1매. 웃음이 나왔다.


인이 박인 일이라 안 봐도 원고지를 아는 것 같지? 선배의 목소리가 동동 떠다니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기자에 한해서는 성격이 드러나는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문득 저쪽에서도 8매짜리 원고를 10매로 올려 불렀을지 궁금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