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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Jun 05. 2022

말 없는 사랑의 뒤에는

비정기적 우편함

1. 집 대청소를 앞두고 말라죽은 화분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오늘 버려, 말어. 다 마른 가지랑 바스러진 꽃잎만 남은 이 화분을 어떻게 처지를 해야 할지, 곤란했다. 죽은 식물은 집에 두지 않는 게 좋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서 마음이 더 분주하다. 하필 그러게 선인장도 죽이는 집에 와서는. 꽃집을 여는 게 꿈이라며 대뜸 화분을 내밀던 사람의 기운에 이끌려 얼결에 주황색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몸에 안았다. 꽃다발도 아니고 내 움직임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리는 화분을 들고 하루를 돌아다녔다.


이름도 어려운 칼랑코에. 잘 죽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목소리가 무색하게 화분은 2주가 지나면서 시들시들. 끝내는 활짝 피었던 꽃잎이 수그러들면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고민이 길어지자 바쁜 몸이 먼저 주변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외출이 잦으면 제일 먼저 집이 망가진다. 집에는 있지도 않았는데 머리카락은 어디서 이렇게 떨어지는지, 청소기를 돌리고 카펫을 털고 밀린 빨래를 하고. 군데군데 끼어있던 자질구레한 종이들을 모아 찢어버리고 나니 금세 쓰레기봉투 10L가 꽉 찼다. 그러니까 잘만 구겨 넣으면 화분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이 남았다.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이걸 버려 말어. 그러고 보니 죽은 화분은 어떻게 버리더라,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죽은 것들은 일반쓰레기란다. 시든 잎은 잘 조각내고, 뿌리는 흙을 잘 털어내어서 일반쓰레기로 들어간다. 나는 의사도 아닌데, 잎이 좀 시들었다고 꽃잎이 모조리 닫혔다고 마음대로 사형선고를 내려도 될까. 내 실수로 죽인 화분, 며칠 전까지는 살아 있었던 것들인데. 이것저것 내 생활이 낳은 진짜 쓰레기들과 함께 버리기는 미안해져서 그대로 쓰레기봉투를 묶고 내보냈다.


그리고 갑자기 꽃이 피었다. 선명한 초록색 줄기가 크게 솟았다. 그 밑에 종종이 달린 꽃잎들이 햇빛을 향해 입을 벌린다. 주홍빛 조명이 책상 한 구석에서 빛났다.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꽃잎이 마치 처음처럼 활짝 피었을 때,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이 없는 것을 마음에 담는 것은 어렵다.



2. 그냥 사랑해주면 안 돼?

어떻게 그냥 사랑을 해. 하다못해 조그만 물건 하나 사는 데도 이유가 붙는데. 내가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그 큰 가능성 앞에서 어떻게 그냥이 나와.

그래도 그냥... 그냥 사랑해줘. 그러면 안 돼?


K와 헤어질 때는 울지는 않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으로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일방적으로 나만 소리를 지른 거였다. 싸움도 서로 가진 패가 맞아야 하는구나. K는 대학 선배였다. 늘 덤덤한 얼굴로 이상한 말들을 일삼는 그런 선배.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다. 좋아함의 역사가 흐릿하다는 점이 늘 내게는 함정이다.


K와 만나기는 했지만,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 K는 나랑 사귀고, 손을 잡고 고민을 나누고 가끔 내 앞에서 울기도 했지만 사랑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저도 본능적으로 알아요. 날 바라보는 눈에 빛이 들어온 적이 없거든요.


그냥은 없지. 나도 알고 있어. 인간이 얼마나 합리적인 동물인데 그렇게 충동에 매번 몸을 맡기겠어. 모든 것이 계산된 거지. 1+1이지만 두 개까지는 필요 없어 너와 나는 음료수 안에도, 오늘 약속이 취소되어서 역까지 같이 걸어갈 수 있겠다는 떠봄에도 그냥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내 모든 철저한 계산이 녹아들어있지. 이상한 행운은 따르지 않는다는 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았어. 작은 행운 역시 준비된 사람에게 오는 거지. 난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니까.


터질 듯 사랑해줘, 내 모든 것이 바스러질 만큼. 이런 말 같은 것은 금지. 사랑이 쌍방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 죽을죄를 지은 사람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매번 사랑의 무게가 같길 기도해요. 딱 저울추에 매달아서 각 120g씩 사랑하시오. 판결대로 마음이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냥 사랑해주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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