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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May 31. 2022

네가 그럴수록 마음은 옳지 못한 길로만

 비정기적 우편함

1. 같은 곳을 계속해서 빙빙 도는 남자가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힘차게, 비틀리는 무릎이나 발목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게나 내딛는 걸음이 딱, 따악, 딱. 새벽 거리를 울렸다. 소리가 가까워지면 얼굴을 돌려 남자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를 꽉 물고 남자는 달린다.      


남자는 내가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만 다섯 바퀴는 넘게 돌았다. 가파른 내리막에서 도저히  멈출 수 없었던 것일지, 아니면 멈추지 않고 싶었던 것일지 알 수는 없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달렸다. 힘껏 내리막을 달렸다. 아니 굴렀다. 바닥을 딛는 소리는 계속해서 똑같은 템포로 땅을 두드렸다. 기다리던 내가 지쳐서 자리를 뜰 때까지 남자는 그 자리를 맴맴 돌며 따악, 딱. 울리는 발소리에 몸을 숨겼다. 남자가 떠난 발자국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2. 카나리아가 울었다. 위험을 알리는 노랫소리가 귓바퀴를 한 번 돌았다. 너는 무슨 위험을 경고하고 있니. 손 위에 내려앉은 카나리아가 애처롭게 날개를 떨었다. 어떤 것의 끝이 오고 있었다. 끝이 두렵지 않은 여자는 하나뿐이었다.      


3. 지하철에는 누구도 받지 않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제는 쓰지 않는 구식 휴대폰의 정직한 벨소리가 오래도록 따르릉 따르릉 울렸다. 누구도 주워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휴대폰의 새로운 울음소리가 시작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쳐드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 사람들 역시 고개를 드는 것 외에 더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이어진 줄 이어폰 역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끝이 닳아 피복이 벗겨진 줄 사이로 얇은 전선 두어 개가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탯줄이었다. 휴대폰과 주인을 간신히 이어주고 있던 줄이 한계의 탄성을 잃고 휴대폰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소리를 잃은 휴대폰은 더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떨어져 나온 고철을 눈으로 좇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인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밀리던 휴대폰이 발치에 닿았다. 숨죽이고 있던 휴대폰이 다시금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따르릉 때르릉. 따르릉 때르릉.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줍는 순간 닫힌 문 너머로 황급히 몸을 던지는 과거의 주인이 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진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그대로 망연자실.      


4. 한 번, 두 번, 세 번. 제 역할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흘러나오면 나는 다시 세탁기에 다가가 시작 버튼을 누른다. 굉음과 함께 천천히 돌아가는 세탁기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드르륵, 드르륵. 주인을 집어삼킨 세탁기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다리가 꼿꼿하게 서 있다. 헹굼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동생이 뚜껑을 열었다. 형, 피부유연제 까먹었다. 아 맞어. 늘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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