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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Apr 12. 2022

부유하는 마음

비정기적 우편함

1. 공기 중에 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공기 중에서 부유하는 물질이 된 기분이 든다. 늘 생뚱맞은 걱정을 안고 살았어도 땅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땅은 늘 내게 완전한 것 그 자체였으므로 그 어이없는 걱정들의 범주 안에 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땅이 울렁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놀이기구를 탄 것도 아닌데 바닥이 이상하게 기울었다. 벽을 짚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땅이 몇 번 더 움찔거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집으로 도망을 왔는데 집이 안전하지 못하면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몸이 떨렸다. 밖이 어떨지는 몰라도 건물 안이 더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한 손에 동생 손을 한 손에 잡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진 대비 훈련 좀 잘 들어놓을걸. 후회하기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길거리에는 나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 충격을 나누고 있었다.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옷이 그들의 긴박함을 알리고 있었다.


흔들림은 금방 멈췄다. 마음은 여전히 울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듯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 앞 초등학교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때 왜 집에 엄마와 아빠가 없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동생과 끝없이 운동장을 돌았다. 엄마와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는 다들 금방 잊어버린 듯했다. 땅이 흔들리던 그 엄청난 감각을. 나는 뉴스를 보면서 한참 동안 밤을 밝혔다. 집 앞에는 생존 배낭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꼬박 일주일 정도는 불면에 시달렸다. 가만히 누워있는 침대가 흔들거리는 것 같아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방바닥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땅에 가까워질수록 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 내 심장소리였다.


완전한 것이 흔들리는 것은 공포스럽다. 요새는 완전한 것들의 균열이 보여도 예전만큼은 무섭지 않다.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그렇게 돼. 언니의 말도 일리가 있다. 예전에는 마음이 불안할 때 누우면 죽으면 어디로 가나, 난 언제 죽게 될까. 그런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금은 당장 내일 마감은 어떻게 하지, 거절당한 섭외 건은 어떻게 풀지, 그런 현실적인 고민으로 몸을 뒤척인다. 지금도 가끔 땅이 울렁거리는 것 같을 때면 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린다. 그리고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의 가짓수를 세기 시작한다. 나는 불완전하고 불안하지만, 그렇게 다시 땅을 짚을 수 있다.


2. 목련이 얼마나 활짝 피는 줄 알아?

언니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목련이 피기 시작하면 아 봄이구나, 알잖아. 그리고  그다음에 더 화려하게 연달아 피는 벚꽃 때문에 목련은 금방 잊혀. 아차 하고 뒤돌아보면 이미 목련은 다 짓밟힌 갈색 얼룩으로만 남지. 처음에만 반짝, 그렇게만 아는 거야. 그래서 난 처음인 것들이 싫어.


언니가 싫다는 것이 처음인지, 목련인지, 아니면 목련 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언니의 마음을 따라 걷다가 길을 잃었고, 언니는 돌아오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헤매다 보면 봄이 끝났고 급작스럽게 여름이 시작됐다. 마주 잡은 손은 축축했지만 아무도 놓지 않는 여름... 그 여름을 기다린다.


3. 날씨가 부쩍 더워졌다. 방 안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놓인 화분에 눈길이 갔다. 선인장에 마지막으로 물을 준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의 쏟아지기 직전의 물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흔쾌히 물을 나눌 생각이 났다. 물병에 든 물을 전부 부어주고 나자 물 받침에 황토색 물이 비죽이 흘러나왔다. 마시던 물병을 기울여 물을 나누었다. 식물에는 정수된 물이 좋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렴 자기 자리도 아닌 곳에 와 있는데 좋을 건 뭐가 있겠는가. 처음 데려온 날로부터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선인장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숙였다. 햇빛에 취약한 것들이 창가에 잔뜩 놓여있는데 옮길 힘은 나지 않았다.


커튼이 없는 방으로 결이 변한 햇빛이 따갑게 밀려 들어왔다. 계절이 바뀌면 공기의 무게도 바뀐다. 여름이 될수록 햇빛은 무거워진다. 목덜미로 부딪히던 햇빛은 오후 4시쯤 되면 장소를 바꾸어 내 뒤쪽에 놓인 침대로 향한다. 나는 햇빛이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땅과 가까워진다. 잠시 한눈을 팔고 나면 해는 져버린다. 서운하다. 내일 해가 다시 뜰 때까지 날 깨우지 말아요. 나는 시들어버린 꽃처럼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그대로 침전한다. 이유 없이 많이 깜빡이는 눈이 부유하는 먼지를 뱉어냈다.


진짜로 여름이 오면, 그리고 어떠한 소득도 없이 이번 여름이 끝나버린다면. 나는 시들지 않는 선인장과 함께 멸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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