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메라다, 비비안마이어 책 리뷰
비비안 마이어 전시를 가기로 한 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집이 도착했다. 컴퓨터로는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틀어놓고 천천히 사진집을 넘겼다. 첫 장에는 그의 상징이기도 한 자화상이 있다. 거울과 거울 사이에 카메라와 자신을 배치하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 고집스러운 얼굴 뒤에는 어떤 삶이 펼쳐져 있을지 궁금했다.
세상과의 연결고리
마이어는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사진을 선택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직접적이자 고립적인 기록 방식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편집 능력으로는 사진의 합성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기의 한계도 있다. 때문에 전적으로 렌즈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하나의 컷으로 분리하는 과정에 철저한 계산이 들어간다.
그의 사진을 보면 세 가지 건물이 하나의 샷에 전부 들어가 있거나, 하나의 시각적 지표만을 중심에 담거나, 벽에 붙은 거울을 기점으로 분할된 두 가지 화면을 보여주는 등 여러 가지 시선을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그가 사용했던 롤라이플렉스는 이를 더 극대화한다. 딱딱한 정사각형 틀 안에 어떠한 장면을 배치할지 고민한 그의 재치와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책에서는 마이어가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이어는 작가이자 편집자로서 사진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롤라이플렉스를 사용하기 전에는 항상 직접 사진을 트리밍(Trimming) 하곤 했는데 실제로 현상소에 요구한 지시사항들을 꽤 까다로웠다고 한다. ‘테두리 없이 확대해달라’, ‘아치 윗부분은 말고 앞만 잘라달라’ 등 사진에 대한 개입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보모이며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전문적인 영역까지.
마이어가 직업을 선택한 것은 실용적인 이유라고 추정된다. 마이어의 고용주 중 한 명은 “마이어는 일찌감치 돌보미가 되겠다고 말했어요. 어느 정도 자유롭기도 하고 거주할 공간도 생기는 직업이라고 했죠.”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마이어는 꽤 여러 집을 옮겨 다녔다. 아이들이 자라면 일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랬다. 집을 옮길 때마다 면접에서 마이어는 “저는 제 인생과 같이 이 집에 들어옵니다. 제 인생은 상자들에 담겨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다. 마이어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사진과 수집품들을 ‘인생’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사진이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예술가와 우울, 불운한 삶은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움직인다. 그들의 삶이 불우해질수록 작품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정신병을 앓았던 뭉크나 루이스웨인의 어딘가 묘하게 일그러진 작품들처럼. 마이어의 사진에는 그런 그늘이 없다. 그리고 넓다. 세상에 대한 부드러운 애정과 구석구석을 탐구하는 호기심,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까지 한 번에 찾아볼 수 있다. 찍힘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놀란 표정이나, 불쾌한 표정이 담겨도 관음적인 시선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장 좋았던 사진/장소 미상,September 18,1962. 책 219페이지
비밀스러운 기록
비비안 마이어를 설명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비밀’이다. 그의 삶은 비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으며, 또 지속적으로 마음과 몸을 기댈 수 있는 가족도 없었다. 한평생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삶에 비밀이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거나, 둘째, 의지할 새로운 다른 무언가를 찾거나. 물론 두 가지 모두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이어 역시 의지할 만한 것으로 사진과 자신을 선택한 것 같다. 마이어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고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눈에 띄는 부류의 사람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투박한 인간관계와 비밀스럽고 독특한 그의 행동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마이어는 누구와도 깊고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지는 않았다. 마이어는 소통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카메라라는 가장 믿음직한 기기를 사용해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소통의 대상이 무조건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 모두가 간과한 사실은 아닐까.
마이어는 자신을 은닉하려 들지 않았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것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문화적인 소통을 하려 나서지는 않았다. 그의 침묵과 매 순간 기록한 방대한 양의 사진은 정확히 대조된다. 마이어가 사진을 자신의 인생이라고 표현한 것은 상당히 담백하고 솔직한 시인이다. 마이어는 항상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계속 찍었다. 그리고 모았다. 계속해서 이야기했고, 기록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흔적이 될 일상의 비밀스러운 기록들과 함께 마이어는 부유하는 삶을 살았다. 비비안 마이어와 존 말루프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우연이 아닐까. 존 말루프는 결과적으로 마이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돌며 그를 알릴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었다.
늘 삶을 표류하던 비비안 마이어는 또 다른 여행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조금 덜 쓸쓸할지도 모르겠다. 마이어를 만날 수 있게 기꺼이 통역사가 되어준 존 말루프에게도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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