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남 1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보고 확인하러 떠나지만
돌아오면 만남의 기억만 남습니다.
짧은 순간의 만남이 십년지기의 만남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인연은 만들기 나름이라 생각합니다.
유럽 배낭여행에선 한국인들 정말 자주 만납니다. 영어가 서툴고 혼자 다니기 싫은 분이라면 여행지에 만나는 누군가를 따라 방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입니다. 첫 여행에서 아무런 약속 없이 이렇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집 떠난 지 3일 만에 소지품 중 제일 비싼 카메라는 덜렁 잃어버리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집에서 새던 쪽박이 나온다고 안 새겠냐?"- 악몽의 일본 여행사건을 떠올리며 그보다는 나았다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제발 돌아갈 때까지 배낭을 통째로 흘리는 불상사는 생기지 말았으면….
[ 재기와 첫 만남 ] 밤 10시, 에든버러행 버스를 타려고 빅토리아 코치역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한국인입니다" 라고 써진 듯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한국인이지? 반갑다." 런던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닐 땐 한국 사람을 못 봤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 전에 유럽을 돌아보려고 런던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저처럼 에든버러를 가는 중이었죠. 불과 며칠이었지만 혀 꼬부라진 소리만 하다 우리말을 쓰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재기가 에든버러를 하루만 보고 다음 날 밤차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에든버러에 도착하여 내가 묵을 숙소에 두 사람의 짐을 풀고 시내와 성을 돌아보았습니다. 성 밖의 pub에서 기네스 한 잔 걸치고, 숙소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고, 내 침대에서 잠시 쉬게 한 다음,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리라 인사하고, 밤 10시에 출발하는 런던행 버스를 태워 보냈습니다. 이 학생의 이름은 이재기입니다.
[ 두 번째 만남 ] 로마투어가 끝나고, "로마의 휴일"을 생각하며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을 다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위치를 가늠하며 길에 서서 지도를 보는데 누군가 "아저씨"하고 부르며 등을 두드렸습니다. 이게 무슨 인연? 에든버러에서 만난 재기를 다시 만난 겁니다. 정말 반갑더군요. 그간의 이야기에 몰두하며 트레비 분수에 도착했습니다. 조명받은 트레비는 황홀한 물줄기에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떠들다 문득 정신이 들었습니다. "재기야 배고프지? 내가 스파게티랑 피자 사줄게!" "참! 아저씨, 떼르미니역에 짐을 맡겼는데 유인 로커라 10시 이전에 짐을 찾아야 한데요." 헉! 그때가 벌써 저녁 9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택시 잡기에 바빠 더 이상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잘 가! 꼭 편지해…."
[ 이산가족 상봉 ] 캬아~ 또 감탄사! 라우터브르넨 역에서 보는 풍광이 죽입니다. 그 후 스위스를 벗어나 몽블랑을 갈 때까지 감탄사는 연발입니다. 정말 눈 덮인 산과 호수만큼 아름다운 건 또 무엇이 있을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역을 빠져나와 주위의 경관에 정신을 빼앗겨 무아지경으로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눈에 익은 학생이 걸어오는 겁니다. "앗! 재기……?" "어? 아저씨?” 동시 다발로 튀어나오는 탄성!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일부러 약속해도 이렇게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여행지가 비슷하여 두 번쯤이야 우연히 만난다고 칩시다. 이 넓은 유럽에서 아무 약속 없이 세 번을 만나다니. 그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세 번쯤은 조금 더 특별한 경우라 하고 접어 두겠습니다. 네 번이라면 이야깃거리가 되겠지요? 가능한 일인지 한번 두고 보자고요. 분단 때 헤어진 이산가족을 만난 기분도 잠시, 1시간 후 재기는 예약된 코스를 밟기 위해 떠나야 했습니다. 작은 배낭 속의 라면과 오징어 한 마리, 먹다가 만 과자를 그 녀석에게 건네주며 "만약 우리가 여행 중 또 만난다면 전생에 부부였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 전생의 인연 ] 제네바역 휴게실에서 여학생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차를 기다렸습니다. 9시쯤 눈에 익은 인간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옵니다. “아이고~ 재기~~!” 하여간 질긴 인연입니다. 이렇게 만나라고 프랑스 열차가 파업했나 봅니다. 우리가 또 만나면 전생에 부부였을 거란 말을 증명해 준 셈이죠. 그런데 여행 후엔 전생의 부인인지 남편인지를 한 번도 못 만났으니 우짜된 일입니까? 10시, 갑자기 역이 술렁술렁…. "바르셀로나행 열차 파업으로 결행." "모든 열차 운행 중지" 에고고 내 팔자야. 그렇다면 진작 알려 주지. 또 갇혀버렸습니다. 재기 말에 의하면 열차 파업이 유럽 곳곳에서 벌어질 조짐이 보인다고. 그동안 제네바 역에서 3명의 학생을 더 만났습니다. 잠자리부터 해결해야겠군요. 영어 잘하는 아이들이 나서서 왔다 갔다 하다 유스호스텔에 방을 잡았습니다. 이럴 땐 동포가 참 좋습니다. 제네바 유스는 남녀 불문하고 다섯 명을 방 한 칸에 몽땅 몰아넣더군요. "고얀 놈들…. 남녀가 유별한 동방예의지국 시민을 몰라보다니.“
아무튼, 40일의 여행 중 아무 약속 없이 4번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후 제가 홈을 만들고 몇 차례 재기와 웹을 통한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혹시 이 글을 본다면 20년 만의 조우가 이루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