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물 이야기
2022년 5월 10일,
상쾌한 함부르크의 아침.
혼자 여행이 주는 해방감은 대단합니다.
느긋하게 뤼벡을 다녀와서 저녁엔 공연을 보기로 했습니다.
뤼벡은 함부르크에서 북동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 있고 기차로는 50분 거리입니다.
이 도시는 한자동맹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함부르크가 대서양과 북해를 끼고 지금까지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면 뤼벡은 빌트 해에 위치하여 한자동맹 시절엔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누리다 점점 쇠퇴해간 도시가 뤼벡입니다.
뤼벡을 대표하는 상징적은 건물은 바로 이곳, 홀슈텐 문입니다.
도시가 크지 않아 반나절이면 다 볼 수 있는 규모고, 독일의 소도시들이 그러하듯 아기자기, 푸근하고 여유롭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함부르크를 거의 왔다 싶었는데 나도 몰래 잠이 들었나 봅니다.
문득, 눈을 뜨자 차에 아무도 없습니다. 창밖을 보니 함부르크 역.
황급히 배낭을 챙겨 내렸습니다.
공연까지는 시간이 남아 시청 주변 사진을 좀 찍어두려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출발 직후, 왠지 느낌이 싸아~~~.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지 않네요. 배낭을 열어보니 역시 없습니다. ㅠㅠ
허걱~~.
뤼벡에서 차에 탄 이후, 카메라를 배낭에 넣지 않고 자리에 함께 두었다가 배낭만 들고 나온 겁니다.
역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당연히 그 자리에 열차는 없습니다.
함부르크 역은 플랫폼이 10개가 넘는 아주 복잡한 역입니다.
멘붕.....
누군가 말을 참 잘 만들어 냅니다.
지구 내부 멘탈층이 붕괴하면 어떻게 될까요?
머릿속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 겁니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악몽이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전에는 렌즈 장착한 카메라 두 대를 동시에 잃어버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궁금하면 여기…….
https://brunch.co.kr/@utbia/41
정신을 가다듬고 역 분실물 센터를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수화물 보관소에 분실물 센터가 있더군요.
자초지종 설명…….
냉정한 직원이 "이곳에서 백날 설명해도 소용없다. 도이치반 DB (독일철도청) 사이트에 들어가서 분실물 신고를 해라."며 URL 하나를 던져 주었습니다.
함부르크 숙소는 역 바로 곁에 있는 제네레이터였습니다.
(제네레이터는 파리, 런던, 에든버러에서 묵어 본 결과. 다른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비해 가격이 좀 높지만, 충분히 만족할 만한 시설의 숙소입니다.)
힘없이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머리에 쥐가 더 납니다.
작은 폰으로 DB에 분실물 신고를 한다는 건 OTL.
제네레이터는 늘 붐벼서 직원과 눈을 마주치기 힘든 상황, 때마침 틈이 보입니다.
직원을 붙잡고 애처롭게 사정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데 이 사이트에 신고 좀 해줄 수 있을까?”
당연히 NO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덕분에 DB에 분실 신고는 마쳤지만,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자면, 한국처럼 안전한 나라는 드뭅니다.
선진국이라는 독일도 치안과 도난에선 그리 믿을 만한 수준은 못되거든요.
기차는 함부르크에서 다시 손님을 태우고 뤼벡이나 다른 지역으로 갔을 테고…….
빈 좌석에 놓여 있는 카메라를 누군가 발견했다면?
이 카메라는 딱 봐도 비싼 물건 견적 나옵니다.
(소니 알파99Mk2 + 자이츠 16-80렌즈 = 시가 400만 원 이상)
진정하려 해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저녁도 건너뛰고, 예약해 둔 공연장에 갔다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중간에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숙소로 돌아와도 시원한 구석이 없고, 역 주변 바에 가서 맥주를 들이켜도 정신이 말똥말똥.
아무튼, 악몽의 날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습니다.
잊자. 그냥 잊어야지…….
어차피 사라진 카메라.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20일 이상 기록한 여행 기록들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저를 믿고 사진 찍지 않은 손님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차 안에서도 맘이 불편한 건 매한가지…….
잡념에 묻혀 프랑크푸르트에 거의 도착할 무렵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베를린 도이체 반 본사에서 온 메일입니다.
“지금 뤼벡 역에서 네가 신고한 물건과 비슷한 카메라가 접수되었다.
아래 연락처로 메일을 보내던가 전화를 해보아라. “
두근 반, 세근 반.....
뤼벡 역이라면 내 카메라가 맞을 확률이 높습니다.
함부르크와 뤼벡을 왕복하는 기차라면 분명 가능성이 있죠.
프랑크푸르트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에게 또 애교를 떨었습니다.
“이러이러 저러저러한데 이 번호에 전화를 한번 해줄 수 있겠니? 통화료는 원하는 대로 줄게…….”
“걱정 마라 도와줄게. 통화료는 필요 없어.”
이번에도 친절한 직원을 만났습니다.
그 직원이 한참을 통화하다 카메라 특징이 어떠하냐고 물어봅니다.
모델명부터 차분히 알려 주었더니 스트렙이 무슨 색이냐고 또 묻습니다.
소니와 미놀타가 함께 써진 검은색…….
맞다고 답이 왔습니다. 와서 찾아가래요. ㅋㅋㅋ
“나 내일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지금 갈 수 없다.
한국 도착하면 주소와 우편료를 보내줄게. 국제우편으로 보내 줄 수 있니? “
“O.K 가능하다”
끝없이 길고 암울했던 터널이 갑자기 핑크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근, 두근..... 사진 파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듯.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PCR 테스트를 받으러 가는 시간 동안 구름을 밟는 기분이 이럴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뤼벡 역에 정식으로 메일을 보냈습니다.
카메라 사진과 여권 사본을 보냈더니 답이 왔습니다.
“국제 우편 수수료가 55유로. 아래 계좌에 입금해 줘라.”
담당자와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카메라를 찾아준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다. 상황을 알려 줄 수 있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항은 외부 유출 금지라 말해줄 수 없다. 너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
이렇게 해서 카메라가 뤼벡 역을 떠난 날이 5월 22일.
5월 23일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국제 우편으로 인계된 이후…….
2주가 넘도록 감감무소식.
한국 우체국과 독일 DHL에 행방조회를 하면 한국은 독일로, 독일은 한국 우체국에 알아보라고 서로 미루면서 행방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왠지 이 카메라가 중간에서 사라졌을 것 같은 악몽에 시달리며 다시 맘고생 시작…….
카메라가 한국에 왔다면 분명히 세관에서 전화가 올 텐데 전화도 없고….
그렇게 피 말리는 날이 다시 시작된 지 10여 일이 지나고,
6월 16일 낮, 문득 문자 하나가 왔습니다.
“문 앞에 우편물 놓고 갑니다. 우체국”
왔???
진짜 왔습니다.
박스가 젖어 한쪽이 찢어졌지만, 내용물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좋을 수가.
그 순간에 메일도 하나 왔습니다. 뤼벡 역에서...
Good morning, Mr Kim.
Good news. The package has reached the postal centre in Korea.
I have given you the link to the Korea Post portal here.
Please click here to track the shipment. Unfortunately, I can't read the Korean characters,
so I'm not sure if you can see everything important here.
I would be happy if you could give me a short feedback if everything is fine.
Mit freundlichen Grüßen, Heiko Bucklisch
바로 답신을 보냈습니다.
Dear, Heiko Bucklisch
Wow~~. The camera just arrived.
I'm really happy.
There is no battery, but other parts are completely normal.
So sorry for causing you a lot of trouble.
Thanks for your kindness.....
If I go to Lübeck, I will visit you.
I want to know what I can do for you.
Anyway, thanks again for the kindness of the Germans.
Sincerely, Kim Heung-soo
Heiko Bucklisch가 바로 답을 보냈습니다.
Hello Mr Kim.
There is nothing you can do for me.
You are happy, that is reward enough for me.
I'm glad everything turned out well.
All the best for your trip to India.
Mit freundlichen Grüßen, Heiko Bucklisch
이 카메라는 사람을 두 번 들었다 놓는군요.
그동안 저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고 도움을 준 뤼벡 역 Heiko Bucklisch 여사에게 (미스인지 미시즈인지 모르지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카메라를 찾아준 분은 더 고맙고요.
함부르크에서 뤼벡을 가는 동안 주인 없이 좌석에서 뒹구는 카메라를 보고도 가져가지 않은 독일 시민 여러분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