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떠나자!
1997년 4월 15일 (지금부터 20년 전)
이것저것 점검을 끝내고 서너 시간 눈을 붙인 후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습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구나….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고 긴 시간 자리를 비운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태연한 척,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지만, 공항이 눈앞에다가 올 때까지 두고 온 가족과 가게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은 천근만 같았습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여 케세이 항공 창문 가 자리에 몸을 맡긴 후에야 떠난다는 것을 비로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무거운 동체가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많은 기억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여보, 미안해. 당신 고생에 보답기 위해서라도 더 큰 사람이 되어 돌아올게…." 황혼에 물든 양털 구름을 밟고 어둠 속을 내달린 비행기가 홍콩 상공을 선회할 때 날개 밑으로 수많은 보석처럼 도심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갑자기 고도를 낮춘 747기는 추락을 하듯 고층건물 사이를 뚫고 하강을 합니다. 잠시 후면 가슴 서늘한 이 스릴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 홍 콩 ]
온풍기를 켜 놓은 듯, 후끈한 남국의 열기를 느끼며 2시간 후 출발하는 런던행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경유 게이트를 따라 면세점에 이르렀습니다. 자유무역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화점처럼 번화합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배낭에 채울 자물쇠가 눈에 띄어 사두었습니다. 현지 시각 10시,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자 간간이 들리던 우리말은 이젠 들어 볼 수 없습니다. 아~ 이제 진짜로 혼자인가 봅니다. 피곤한 몸을 쉬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신경에 거슬립니다. 모든 교통수단 중 으뜸이라는 비행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불편한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잠을 청하려던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고 준비해 간 자료들을 꺼내어 메모한 후, 책 한 권 분량을 짐에서 덜어내 버렸습니다.
좁은 공간에 묶여있었지만,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가벼운 것은 긴장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동 항로 기록 장치에 영국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인이 들어 올 무렵 이른 아침 식사가 나왔습니다.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식 하나하나를 의식을 진행하듯 천천히 씹으며 커피까지 곱빼기로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착륙 준비 끝. 이제는 정말 외국에 왔다는 생각에 긴장되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지구의 반대편에 온 웃비아는 미아 아닌 미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 런던 히드로 공항 ]
입국 게이트에 패스포트를 손에 든 40대 아저씨는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표정입니다. "입국 심사는 어떻게 대처하지?. 영국은 심사가 꽤 까다롭다는데…. 시내까지 가는 버스는 어떻게 타지? 유스호스텔은 어떻게 찾나? "줄이 점점 줄어들고 드디어 차례가 왔습니다. "안녕, 잘 왔다." "패스포트 줘 봐. "잠이 덜 깬 뚱뚱한 아저씨가 비교적 상냥하게 말합니다. 최대한 공손히 패스포트를 내밀고 애써 웃어 보였죠. "얼마나 머물래?" "4 days". "무슨 목적으로 왔니?" "Sight-seeing" "꽝" “아니? 내가 지금 저 양반이 한 말을 알아들었단 말이야?” 단 두 마디에 입국을 허락하는 도장이 찍히고 웃으며 잘 가라는 인사를 합니다. “에구 괜히 얼었네….” 갑자기 밀려오는 안도감에 다리에 맥이 풀려 허공을 걷는 듯 배낭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2번째 관문, 몇 번을 보고 확인해둔 지도와 메모지를 다시 확인하고 대충 짐작하여 청사 옆 버스 스테이션에 접어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빨간 이층 버스가 2번 NO를 선명히 달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면 그렇지…. 공부해둔 대로잖아! 한데 티켓은 어디서 끊냐?.".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매표소를 찾아 표를 끊고 버스에 오르니 이제 한 가지 걱정만 남았습니다.
유스호스텔을 찾는 것. 기사에게 내릴 곳을 표시해둔 지도를 보여주자 웃으며 알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신나게 이 층에 올라 배낭을 내리고 보니 달랑 혼자뿐입니다. 고속도로쯤 됨직한 길을 달릴 때 태양이 눈부시게 화창한 햇살을 비춰 줍니다. 주변의 경관은 그야말로 "환상"…. 넓은 목초지와 나무에 쌓인 예쁜 집. "아~ 여기가 영국인가벼…." 이제 걱정할 틈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까지 축복해 주는듯하여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 홀랜드 파크 ]
영화에서만 보던 잘 단장된 돌집 사이로 벚꽃이 만발하여 꽃잎을 떨구고 있었습니다. “지금 전주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 벚나무를 보자 신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온 동네 이름이 홀랜드 파크인지라 이리저리 물어 홀랜드 공원을 찾아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잔디밭 건너 아름드리나무에 쌓인 오래된 저택이 눈에 뜨이더군요. 유스호스텔이라 하여 우리나라 여관 같은 건물을 생각했는데 의외였죠. 프런트에 IBN 예약 영수증을 보여주니 짐을 맡겨두고 체크아웃이 끝나는 정오 이후에 방을 이용하라고 합니다. "걱정 마슈~. 나 놀다 저녁에 올 테니 방 잘 맡아 둬…." 이제부터 본격적인 웃비아의 유럽 탐험이 시작된 겁니다.
[ 나가자! ]
씩씩하게 버스를 잡아타고 넬슨 제독의 동상이 우뚝 선 트래펄가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몰을 따라 위병 교대식이 있는 버킹엄 궁전으로…. 근엄한 근위대 맨 앞에 염소를 몰고 나오는 장교를 보고 뒤집어졌습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넓고 푸른 하이드 파크에서 휴식을 취하고, 런던의 상징 빅벤에 다가가자 웅장한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띠 디 디 디 디디디디 뎅~ 뎅~ 뎅~ 뎅~” (악보가 없어 표현이 안 되네) 듣는 순간 실성한 놈처럼 또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우리나라 벽시계에서 매시간마다 들려주는 바로 그 신호음….) 그 시계 소리의 원조가 빅벤일 줄이야.
작지만 정교한 성 마가릿 성당을 들러 보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시간을 꽤 많이 지체한 다음 템스 강에 다다랐습니다. “헉! 한강보다 엄청 작다.” 하루해가 너무 짧았습니다. 아쉽지만 유스호스텔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라 온종일 신기하여 정신이 없었지요. 6인실 도미토리에서 서양 사람들 틈에 끼어 잔다는 것 역시 첫 경험입니다. 왠지 어색하고 조마조마해졌습니다. 일단, 배낭을 찾고 카운터에서 지정해 준 방을 찾아, 달그락달그락…. 너무 긴장하여 방문 여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 마르쿠스 Marcus ]
"할로!" 털북숭이 산적 두목이 인사를 합니다. "헉!"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모기만 한 소리로 "Hi~!" 그다음부터는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비몽사몽 침상에 배낭을 내려놓고 부스럭거리며 짐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재빨리 상황 파악. 네 명의 일당이 독일에서 놀러 온 패거리였습니다. 이놈들이 동양인을 신기한 동물 보듯 하며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소소한 질문 시작. 더듬더듬 짧은 단어로 대답하며 식은땀을 줄줄~. 두목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맥주 캔 하나를 건넵니다. "당케 쉔" (독일 말 이거 하나는 알고 갔어요.^^) 넙죽 받아 마시긴 했는데, 다음 말을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죠.
슬며시 배낭에서 미리 써간 편지를 산적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바디랭귀지라는 부분을 읽더니 배꼽을 잡고 웃습니다. 대뜸 메모지에 자기들 주소를 적어서 주더 군요. 그다음엔 공항에서 가져간 한국 소개 팸플릿, 뷰티풀을 연발합니다.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아이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못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왠지 마음이 놓이고…. 맥주 캔이 비기 무섭게 또 한 캔, 다시 또 한 캔. 1시간 반 동안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며 웃고 떠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르쿠스는 베를린에 삽니다. 직업은 기차 기관사, 봄 휴가를 맞아 역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영국을 닷새간 놀러 왔었답니다. 서른을 넘겼는데 장가를 안 갔더군요. 당뇨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산다는 걸 보니 효자입니다. 여행이 끝나고 산적들을 대표하여 두목에게 편지를 띄웠지요. 고마웠다고…. 지난 몇 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제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든 이후 바쁘다는 핑계로 펜팔 친구들에게 소홀해졌습니다. 독일을 갈 기회가 있다면 마르쿠스가 운전하는 기차를 타 보면 좋을 텐데 언제가 될지 하느님만 아시겠죠? 아무튼, 유럽에서 첫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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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미지
배낭여행을 준비하신다면 첫 페이지부터 차분히 보아주시길 권합니다. 이 시리즈는 단행본 두 권 정도 분량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독하시면 여행 준비에 도움은 물론, 현지에서 시행착오도 훨씬 줄어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