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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Apr 17. 2018

북한과 춤을! Shall we dance?

DMZ에서 생각해 본 통일에 대한 단상

봄이 오면 벚꽃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매년 찾아오는 바이어가 있습니다.

베트남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 LA에 거주하며 10여 년간 꾸준히 거래하고 있는 형제와 같은 친구들입니다.


4월이면 화창한 봄날의 정취를 즐기며 꽃놀이를 가야 할 텐데 변덕스러운 날씨는 두툼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살을 에일듯한 바람과 함께 뿌연 황사까지 더해지니 제 잘못도 아니건만 먼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괜스레 면목이 없어집니다.

이번에는 군사 분계선 DMZ(demilitarized zone)을 방문해 보기로 사전 약속했던 터라 호텔 픽업 시간에 맞추어 일찍부터 부랴 부랴 집을 나서봅니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DMZ와 제 3 땅굴을 둘러보며 한국의 과거와 통일 비전에 대해 바이어와 의견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바이어는 미국 시민권자로 정확한 개인적 사연이야 잘 모르겠지만 베트남의 공산화를 피해 피난하면서 구구 절절한 사연이 있었겠지요.

특히 현대 베트남 공산주의의 부패와 실패한 사회주의에 대한 사업가로서의 반감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은 희뿌연 하게 보이는 것은 그날따라 유난히 심해 보였던 미세 먼지 탓 만은 아닌 듯합니다.

70여 년 가까이 교류가 끊어진 시간의 상흔에 더하여 마음속 분단의 간격이 물리적 거리상으로는 바로 지척인 저 너머 북한 땅을 아스라한 안갯속의 신기루처럼 희뿌연 하게 보이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남/북한과의 대화, 그리고 미국과의 협상, 더 나아가 남북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역학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까요?

과연 최후에 웃는 자는 누가 될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 일단은 북한 정권의 실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조선이 건국되어 활약하던 14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동유럽에는 터키족이 세운 오스만 제국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7대 술탄인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고 10대 술탄인 술레이만 1세(1520~1566년)는 헝가리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동부 지중해의 제해권까지 장악했던 강국이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던 오스만 제국의 힘의 근원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술탄의 존재에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현대 북한의 주석은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오스만 술탄 제국의 정치는 현재의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는 어전회의(디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이 회의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술탄은 거의 불참하는 것이 관례였고 실제 회의를 주재한 이는 술탄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대재상(사드라 잠)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이 일상적으로 국무회의에 빠지고 국무총리가 국정을 논의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누구처럼 잠을 자느라 그런 건 아니고요ㅠ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들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유력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대부분 술탄에 예속된 궁정 노예 출신으로, 동양의 내시들과 신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재상 밑에 소속된 재상들은 아예 환관이 배치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쉽게 생각하면 조선의 영의정이 노비인 것인데 대략 난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의 이면에는 술탄의 치밀한 정치 술수가 숨어 있습니다.

명문 귀족 출신이라면 왕의 명령이 가문의 이권에 반하는 정책일 때는 반대를 할 수도 있고 눈치를 보아야 할 대상들도 많아 어떤 정책이든 반대를 위한 반대로 탁상공론만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았겠지요.(지역 정치와 기득권 세력에 기반을 둔 우리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노예 출신이라면 신분이 비천하다 보니 술탄 이외에는 연줄도 없고 눈치를 볼 것도 없으니 명령을 실행하는데 별로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런 연차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이 결심하면 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사적 정벌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로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겪으면서도 가공할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 한 북한의 정치 시스템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스만 제국에 술탄이 있었다고 하면 북한에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는 김씨 일족이 있습니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남북 대화를 앞둔 김정은이 김정일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선군정치 시대를 종식시키고 당/국가 중심 체제로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1992년 군 간부 524명을 소장으로 96명을 중장으로 진급시키면서 군을 우대하는 군부 중심의 특권 정치 체제를 출범시켰습니다.

군대도 당의 지휘 하에 복종하는 공산주의 특징상 군인들도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스템인데 현역 군인들을 대거 요직에 배치함으로 사회 전체가 군대에 예속되는 모습으로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이런 형태가 핵무기를 세상의 예상을 뒤집고 빠른 속도로 개발하는데 주요한 원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군을 중심으로 사회의 모든 가용 자원을 쏟아붓는 연구 개발은 기형적이긴 하지만 특정 분야의 기술을 벤치마킹(benchmarking) 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체제는 다양한 분야의 주체가 골고루 참여해야 하는 경제 발전에는 효율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참여 주체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해야 하는 곳에서 군대는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군사 독재형 국가들의 경제 발전 실패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김정은 정권 6년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올인(all in) 한 시기였다면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을 선언함으로써 '선군 정치'는 외형적으로는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 세대는 아버지 세대인 김정일 위원장이 외교에 의존한 시장 개혁을 추진할 때 주변국이 어떻게 했는지 보고 자란 세대입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체제 안정을 보장받으려 했던 북한은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 확대와 경제 압박으로 이제 비핵화를 미끼로 한 경제 보상 외교 노선으로 한발 물러서려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력 완성의 또 다른 병진노선인 경제발전을 함께 할 당과 엘리트를 우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군부를 당과 국가의 예속 체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1인 지배체제 강화와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미국과 북한의 향후 관계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개화기 이후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고종의 외교적 노력에도 미국은 조선의 일본 식민지 편입을 필리핀과 맞바꾸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지금도 중동 및 유럽 지역의 분쟁이 우선 인 듯 보이며 현재의 아시아 정책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성격이 강한 듯합니다.

현재 아시아의 외교적 이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륙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는 해양 세력의 대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공교롭게도 중국과 영토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 대만, 필리핀 등은 모두 섬나라입니다.

미국은 이들 해양 세력을 지원함으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외교적 중재자 역할을 통해 큰 실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핵무기 완성을 선언한 이후 북한의 전략적 선택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 재재 해제와 지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비핵화·경제보상의 협상 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면 어떨까요?


북한은 아마도 미국으로부터 비핵화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이미 확인하고 실망한 것 같습니다.

피상적으로는 미국과의 협상을 원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2016년 9월 5차 핵실험 직후부터 시작한 비핵화 협상의 상대방은 중국이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 8월부터 지난해 3월 31일까지 핵 폐기 대가로 500억 달러를 요구하는 협상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말 협상은 일단 무산되었다고 <시사IN>은 전하고 있습니다.(제506호 4월 ‘한반도 위기설 어떻게 지나갔나’ 기사 참조).

그래서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방문은 사실상 그 두 번째 협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2000년 5월 김정일의 베이징 방문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던 김정은의 방문 목적과 의도는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확보였으리라 보입니다.


1990년대 북한에게는 무려 300~500만 명이 굶어 죽는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고 대홍수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북한의 김정일은 체재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당시 북한 수뇌부는 경제 회생을 위한 비밀 계획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2002년까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2012년에는 우리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과도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이 계획의 요체였습니다.

그리하여 혈맹이라 여겨지던 중국에 돈을 빌려 경제 발전을 위한 종잣돈을 삼고자 한 것인데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요구한 액수는 30억 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10억 달러만 제공하면서 그마저도 한 번에 주지 않고 전력 및 에너지 분야에 각 3억 달러, 식량 농업 분야에 각 2억 달러로 두 차례 나누어 제공하는 식이었습니다.


북한의 또 다른 복안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한 배상금을 경제 발전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었습니다.

약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던 배상금을 받기 위해 김정일은 굴욕을 무릅쓰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사과하면서 일본 총리인 고이즈미와 정상 회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방부 장관이었던 아베(현 일본 총리)가 납치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반대하면서 결국 북일 수교는 물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번 중국을 방문해 자금을 얻고자 했지만 신의주를 중국의 개발 조차지로 넘겨 달라는 중국의 뻔뻔한 요구에 그만 두 손 들고 말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면서 상을 뒤엎는 판이라 갈수록 꼬여만 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시장 개방 조치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반발력으로 북한은 급속도로 보수화 되었습니다.

이른바 군부를 앞세운 강성대국이라 불리는 논리가 시작된 것도 이때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무서운 아이들(앙상 테 리블)이라 불리는 김정은 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장 개방을 고민하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이 그토록 무섭게 핵무기 개발을 통한 대결을 추구한 것은 힘만이 통할 수 있다는 과거의 경험 때문입니다.


주변 이웃들에게 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걷어 차이던 북한이 이를 갈며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해법을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고민하고 얘기합니다.

개인적으로 경제적 보상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고 지난 20년간 쌓였던 원한과 갈등의 감정부터 풀어 나가는 것이 근본적인 비핵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 여행의 종착지로 들른 곳은 도라산역이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위치한 역사에는 매서운 북풍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인적도 드물다 보니 왠지 마음속 한편이 아려왔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도라산역이 개통된다면 서울부터 평양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꿈을 꿉니다.

황량한 역사가 평양으로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고 방학을 맞은 청년들이 대륙 열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가기 위해 표를 구매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 민족이 70년의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로 합치는 그날...

역사 안 동포와 얼싸안고 춤을 추며 신의주로 여행을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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