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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Apr 22. 2019

북한과 베네주엘라의 생존 외교 그 끝은 어디일까?

페르소마가 사라진 국제관계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잠재되어 있던 사람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표정이 없거나 무관심의 가면을 걸친 좀비들만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타인이 어떤 행동을 하던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에 분노가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다혈질인 사람 정도로 보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데 최근에 묻지 마 살인 등의 반사회적 범죄가 자주 발생되는 상황으로 심각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경제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걸치고 있었던 사회적 가면을 벗고 적나라한 자신의 속마음을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을 이용해 자주 내보이고 있습니다. 일베나 워마드로 대표되는 사회 일탈 사이트들이 사라지지 않고 범람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런 가면을 심리학적 용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합니다.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가 하는 가면을 말하는데 이후 라틴어로 섞이며 사람(Person)/인격, 성격(personality)의 어원이 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통상적으로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쓰는 가면"을 의미합니다. 깊게 들어가면 SNS에서 사용하는 프로필 사진이나 어떤 인물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특정 고유 이미지 같은 것 역시 페르소나로 설명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뿐 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페르소나가 사라지는 비슷한 현상들이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문화나 일본 제품은 좋아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해서는 저항감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앙숙인 국가 일본에 대해 이제는 당당한 목소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의견도 강해지고 있으며 최근 우리 대법원에서는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개인 배상 청구권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일본에 당하기만 하던 약자의 페르소나를 벗은 후에 나타나고 있는 긍정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는 도처에 앙숙인 국가들이 많습니다. 유럽을 보면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오랜 기간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친 투쟁을 벌여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독일과 폴란드도 영토 문제 등이 개입되어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바 있습니다. 동유럽에서도 내전시 인종 청소 범죄까지 발생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앙숙이며, 헝가리와 루마니아,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대만이 정치적으로 앙숙 관계이며 인도와 파키스탄은 바로 얼마 전 서로 전투기로 공중전까지 치를 정도로 적대적입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도 앙숙인데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를 몰아낸 적이 있을 정도록 정치적으로 연관되어 있어 감정이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 외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 분쟁, 이라크와 이란의 지역 주도권 다툼,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종파 세력 다툼 등으로 앙숙 관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와 미국,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페루와 에콰도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서로 앙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서로 인접한 국가들이 거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국제 관계에서는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은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네요. 관용과 포용은 형식적 인사치레에 불과할 뿐이고 이웃 국가 간의 국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자신과 상대 국가의 힘의 균형만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 사회에서는 약자라 하더라도 국가 기관과 경찰을 포함한 공권력이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할 수 있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힘이 없다면 그저 약탈당하고 무시당하게 됩니다.


북한과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보면서 요즘 드는 생각은 가면의 무서움입니다. 미국과 북한을 비롯한 모든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동안 걸치고 있던 합리와 도덕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습니다. 가면을 벗은 후에 남은 얼굴은 천사의 미소일 수도 악마의 비웃음일 수도 있습니다. 가면을 벗은 후 볼 수 있는 얼굴은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힘에 따라 결과가 바뀌게 된다는 점이 무섭습니다.


한반도에 비핵화와 평화 통일을 바라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가면을 벗은 후 악마의 비웃음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며 이는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고통은 국민과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짐이기에 정치인들을 욕만 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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