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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May 31. 2021

혐오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세상- 유목민 시대의 재림..

초원의 유목민에게는 오랜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유목인의 게르를 찾는 손님은 누구든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 친분도 없는 외부인이 환영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목의 특성상 자연과 기후의 변화에 의해 운명이 쉽게 변화되는 환경에서는 오늘은 내가 도움을 주는 입장이지만 내일은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는 몽골인들이 손님에게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도 있었다고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 문화에 대한 허풍이 심했던 당시 유럽인의 관점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한다면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더라도 현대 인권 측면에서 보면 악습이기도 합니다.


유목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입니다. 가축의 고기와 우유로 식량을 하고 가축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나무와 가죽으로 텐트를 지어 생활합니다. 유목민은 공격성이 강한 민족으로 생각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일부 약탈 행위가 있었지만 부족한 물자는 대부분 교역을 통해 구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신체적으로는 농경민에 가깝지만 정신적으로는 유목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합니다. 현대인들은 도시에 모여 집과 직장을 왕복하며 살아 가지만 이미 정신은 거리의 속박을 벗어나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정보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신체와 정신의 분리는 4차 산업 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정보기술 서비스 산업을 잉태하고 기술을 독점할 수 있는 엘리트들의 영향력은 앞으로 커져만 갈 것입니다.


더 많은 정보가 더 많은 뉴스를 생산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문제들도 주변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인간의 욕망과 투자자의 탐욕에 충실한 결과 자본을 가진 세대의 자산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청년층의 자산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통계 결과도 발표되었습니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자녀 세대의 미래는 이미 우리 앞에 현실로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특히 노령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반면 청년층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득 및 자산 배분의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갈 것입니다. 


신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나누던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로 출발했던 민주주의 혁명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져 가고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은 다양할 수 있지만 필자는 기본적으로 공정과 평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반 혹은 귀족의 자녀들은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것이 당연했던 시대처럼 2021년 현시대 서민들의 자녀들도 점차 당연시되는 불공정의 문제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확대되는 근본 문제는 무엇일까 고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가 망할 거라고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세상은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벼락 거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나만 빼고 다들 부자가 되어 가는 듯 보이고 자본가는 더욱 큰 부자가 되어만 갑니다. 코로나 이후 이런 현상은 유독 심해져 가고 있음을 실물 경제에서 체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원인 중 하나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폭주이기도 합니다. 자본 시장에서 돈은 항상 순환해야 하는데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위험이 동시에 증가하던 지난 10년간 돈은 그나마 손실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부동산과 같이 특정 자산에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는 것과 같이 쌓이기만 하고 흐르지 않는 돈은 한계에 다다르면 어느 날 갑자기 방둑이 터지면서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방둑 아래 살던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저수지 위쪽에 거주하는 상위 1%는 구경하며 고기 잡느라 즐거워하겠지만 방둑 아래 사는 90%는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됩니다. 


자본주의 폐해가 쌓여 가면서 서민들은 오랫동안 그 피해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비극은 당사자에 머물지 않고 그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공정과 평등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계속되는 피해는 누적되면서 이제는 청년들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게 만들고 있습니다. 영혼까지 끌어 모은다는 '영끌'이라는 신조어는 고착화되는 자본 신분제 사회를 벗어나 보고자 하는 소리 없는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 상징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처절한 저항입니다. 


두려운 것은 직장에서 선임에게 갖은 못된 짓을 당하며 갈굼을 당한 후임이 자신의 후배에게 더욱 지독하게 행동하는 것과 같이 앞으로 청년들의 자존감은 더욱 낮아져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몸의 상처는 치료하면 나을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는 치유가 쉽지 않습니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모든 걸 잃게 됩니다.


어쩌면 신체는 고달팠지만 정신은 자유로왔던 유목민 시대의 문화로 돌아가는 것이 해답을 찾는 여정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끌'이라는 슬픈 단어가 사라지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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