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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Aug 01. 2022

흐릿함과 뚜렷함의 경계: 윤리가 생존의 문제가 될 때

살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폭력적이거나 냉정한 사람도 있었고 이기적인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다정한 말투에 하는 말도 다 맞고 인간적이기까지 한데 정작 실제로 하는 행동은 반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챙겨주는 것 같지만 뭔가 항상 개운하지 않고 뒤끝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를 낮추어 보이게 하는 씨앗을 말속에 심어둔다. 언젠가는 씨앗이 자라나 상대를 콕 찌르는 가시가 된다. 이런 부류는 처음부터 만나지 않거나 인간관계를 일찍 정리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개인에게는 큰 복 (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행운이나 오붓한 행복만이 복이 아니다. 최악은 상황이 악화되어 가스 라이팅(gaslighting)을 당해 삶 전체가 불행해지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적응하는 놀라운 존재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런 생존을 위한 적응력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도 존재한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조심하면 되지만 상대가 사회 전체가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의도조차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무력해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군부독재 시절 삼청교육대라는 사회정화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한 적이 있었다. 명분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깡패나 불량배들을 잡아들여 격리하고 노동을 통해 참인간으로 만든다는 설정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본질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뉴스만이 진실인양 알려지면 침묵 속에서 희생자의 눈물은 묻히고 만다. 


부자 감세가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발전시킬 것이라 얘기하는 자들이 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을 산업 역군이라 칭하며 정규직 임금의 절반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희생이 당연하다며 핏대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현재가 만들어졌다면 당연한 보상도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입으로는 약자를 위하는 이야기 하면서 실제 행동은 다르다면 위험하다. 약자들이 조용해지면 언젠가 칼 끝이 또 다른 약자를 겨눌 것이고 마침내 나의 차례로 다가올 때 생존의 문제가 된다.


역겨운 헛소리들이 도처에 만연해지면 상식은 무너지고 윤리는 선택이 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자유지만 생존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다면 고통은 어느새 나의 문 앞에까지 이르게 된다. 노동의 가치보다 불로소득이 거대해지는 현상은 자본의 미래이고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다. 나를 포함해 우리는 모두 부자로 향하는 진실을 알고 있고 갈수록 가속도를 높여가는 그 열차에 사다리를 걸치려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고민해야 하는 것은 기차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약자가 어는 순간 내가 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First they came)이라는 시가 생각나는 하루다.


처음에 나치는 공산당원을 찾아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다음에 나치는 사회주의자들을 덮쳤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다음에 나치는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어느 날 나치는 유대인들을 끌고 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나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나치가 나에게 찾아왔을 때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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