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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Aug 17. 2022

잘못된 자유의 부활: 늑대에 자유를 양에겐 지옥을

지난 수천 년간 인류의 문명은 세계 도처에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서양 문명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이어져 고대 인류에게 지식과 번영의 문화를 선물하였다. 이 중 많은 유럽인들에게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시작점으로 간주된다. 올림푸스 산 정상에 살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를 비롯한 그들의 이야기는 만화로도 인기가 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은 아테네와 테베,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국가 문명이었다는 점이다. 한국과 그리스는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간 지역으로 인해 농사짓기 힘든 척박한 환경 그리고 대륙과 해양 세력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이 있다. 여기에 '흥(興: excitement)'과 '한(恨: resentment)'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국민성도 그렇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가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찬란한 흔적을 남긴 반면 상대적으로 고대 한국의 문화유산은 빈약해 보이기도 한다.


흥겨움과 원한을 동시에 마음속에 간직한 한민족의 문명이 번성하지 못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혹자는 자신의 문화를 업신여기게 만든 일제 식민지 사관이 아직도 뿌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좀 더 근본적 원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통치 시스템의 차이로 인한 사회 혁신의 가능성 차이에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고대 그리스가 도시 국가 체제의 불완전 하기는 했지만 민주 정치권력 기반이었음에 비해 우리는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체제를 선호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보면 한국을 부러워했던 흔적이 있다. 


중국 진나라 때 쓰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한민족은 '농사 절기에 맞추어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폭정과 기근으로 시달리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것은 매우 부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 공자는 “중국 땅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군사 불사 지국인 동이에 가고자 한다”라며 뗏목을 바다로 띄웠다고도 한다. 공자의 입장에서 당시의 우리나라는 <예>와 <인>에서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국가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에 한국은 고조선이 붕괴되고 마한, 진한, 변한 등의 소규모 국가로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시기였다. 즉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비슷한 부족 연합체 수준으로 사회적/경제적 혁신이 원활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강력한 왕권 국가가 뿌리내리면서 우리는 차츰 선진국의 위치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즉 독재가 민주를 대체하면서 혁신이 사라져 문명의 발전을 저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중국은 전설 시대의 하나라와 상나라를 제외하고는 절대 독재 왕정 국가로만 역사가 이루어졌다. 중국의 입장에서 민주화된 국가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당시 공자의 관점에서 부족 국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이런 전통은 중국 공산당을 통해 이어져 오고 있는데 민주화가 언젠가는 이루어져 좋은 이웃으로 공동 번영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 물론 전적으로 비전문가인 필자의 뇌피셜일 뿐이니 근거는 전혀 없음을 밝힌다.


국민이 권력을 선택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신권통치를 꿈꾸는 절대 왕정의 차이를 싸움으로 비교해 보자. UFC 격투기의 전문 선수와 거리의 싸움꾼은 둘 다 싸움에 일가견이 있지만 막상 대결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매우 자명하다. 즉 어린아이와 어른이 싸우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둘 다 사람 대 사람이므로 공평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민주주의와 왕권의 차이가 이와 비슷하지 싶다. 둘 다 국가의 통치를 잘해 나갈 수 있지만 결국 '자유'가 실종된 정치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국민을 피폐하게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최근 자유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자본이 많은 사람이 자본이 적은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자유'를 주장하는 이른바 보수 세력이 득세하였다. 


계층 간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 차는 시스템을 추구하기 위해  거대 자본이 독주할 수 있는 기득권만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나는 이런 자유를 거부하고 싶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싸우면 사람 대 사람으로는 공평하지만 체급상으로는 절대 공정하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하고 공평한 경기가 되도록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이미 자본이 많은 사람이 자본이 없는 서민을 상대로 <자본의 경기>를 한다면 마음대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승리하지 못하게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된 심판이 지켜 주어야 한다. 아무리 나쁜 심판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관중만 존재하는 경기보다 공평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세상은 다시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보험 심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면서 보험심사 담당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현상이 현실화되어 가면서 업무 자동화를 위한 인공지능의 도입과 비대면 업무가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세대 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가 고착화되고 있다. 


변화의 시대에 그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소시민적 삶의 방식이 나에게는 맞다. 그저 가족은 무엇보다 우선이다. 하지만 잘못된 자유가 판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생각을 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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