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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Jun 09. 2023

기념주화에서 보는 역사: 삶이 고달플 때 존재감과 본질

내가 최초로 수집한 주화는 영국의 소브린(Sovereign) 금화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 근무지였던 스리랑카에서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음에도 실험실 실장님으로 강제 배치되었다.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이 좌충우돌하던 시기였지만 젊음의 패기로 내딛는 길은 항상 두근거렸다. 


소브린 주화는 현지 실험실 직원들이 퇴사 때 선물했던 기념품이다. 최근 다시 살펴보니 여러 정황상 모조품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설령 가짜 주화일지라도 가장 소중한 애장품이다. 살아보니 추억처럼 귀한 가치는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지만 인간은 지나간 추억 속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을 그리워한다.


소브린 금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헨리 7세가 1489년에 처음 발행하였으며, 근대식 금화는 1817년부터 발행되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여러 종류가 발행되었고, 발행 연대에 따른 여러 군주들이 등장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더 이상 통용 주화는 아니지만 1979년부터 수집용 주화로 다시 발행되었고 아직 법정 통화로 기능을 하고 있다. 


소장한 1912년 주화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VII 초상화가 새겨져 있고(1912년이면 조지 V 통치 기간으로 이것부터 이상한데 발행지역 조폐국 마크도 없다.ㅠㅠ) 뒷면에는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무찌르는 도안이 인쇄되어 있다. 수호성인이 용을 학살하는 장면은 아름답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명성 아래에는 인도를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를 착취하며 현지 민족 간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던 영국의 추악한 진실도 숨겨져 있다. 


인도양의 진주라 불리는 스리랑카도 오랜 내전을 겪었다. 영국이 인도에서 이주시킨 타밀족과 현지 원주민이었던 싱할라족과의 다툼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 후손들에까지 상처를 새겼다. 최근 군부 독재로 문제가 심각한 미얀마의 경우 영국이 방글라데시로부터 이주시킨 로힝야족과의 갈등으로 대량 학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힘이 곧 정의인 냉혹한 세상에서는 약자의 슬픔이 보이고 들리지 않을지라도 부끄러움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존재이다. 요즘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며 사는 것이 피곤한 중장년층과 청년층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노년층이 세계 자살률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나이가 들수록 삶의 기쁨이 메말라간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인간의 본질을 잊어버릴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생긴다. 외면만을 본다면 화려했던 청춘의 싱그러움이 사라지고 초췌한 더부룩함이 먼저 눈에 띄는 중년은 존재감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적 가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가 한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돈이 곧 가치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귀금속인 금(gold)과 은(silver)은 고대에도 매우 귀한 광물이었지만 특히 금은 절대적인 가치에서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넘볼 수 없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계에서도 금과 은이 없다면 첨단 전자 제품 생산이 어려울 정도로 필수재이다. 현대 화폐 경제에서 돈과 금을 일대일로 교환해 주는 방식은 폐지되었지만 귀금속에 대한 믿음은 여전하다. 


본질을 망각할 때 돈의 실질 가치는 사라진다. 인쇄된 종이가 구매력에 대한 보증이 없다면 수집가를 제외하고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있기에 설령 지폐가 심하게 구겨져 있더라도 그 실질적 가치에는 변함이 없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우리의 존재 가치도 변함이 없다. 치열한 직장에서 퇴직 후 이전과 같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가치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골동품의 가치가 올라가듯이 연륜의 가치 또한 상승하는 것이 인생이다.


오늘의 고단함에 남몰래 한숨을 쉬는 우리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비록 작은 한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잊지 말자. 당신의 본질적 가치는 나이가 먹고 외모가 초췌해지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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