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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지털전사 Jun 10. 2023

기념주화로 보는 역사: 누가 괴물인가? 악은 곁에 있다

이전 글에서 영국의 소브린 주화에 대해 소개했다. 주화의 후면에는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죽이는 장면이 인쇄되어 있다. 괴물인 용은 용사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후의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생각해 본다. 

먼저 괴물이란 무엇인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괴물(怪物, monster)이란 사람의 입장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생명체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만 본다면 말발굽에 짓밟히는 용은 괴물이 맞다. 굳이 인간만을 상대로 철천지 원수처럼 괴롭히는 상대라면 죽여야 할 진짜 괴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격적 행동이 그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면 학살은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요즘 우리 사회를 계층 간, 세대 간 분열시키는 갈등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와 다른 생각과 정책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과 정당을 마치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적대시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민주 사회에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에도 토론은커녕 상대방에 대한 증오만 커져간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이 가능하기에 단순한 말로도 잔인한 인격 모욕과 난도질을 할 수 있고 정신적 살인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원이 노출되지 않는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나 실제 물리적 행동으로까지 실행하는 것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권력이 보호막이 되어 부도덕한 행동을 명령한다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처럼 그저 상부의 권위적 명령에 충실했던 평범한 인간도 괴물이 된다. 바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최근 실제로 심리적 충돌이 물리적으로 이어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고공 농성장에서 시위를 하는 노동조합의 간부를 쇠파이프로 내려치며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은 악의 평범성이 재연되는 반복이다. 


상명하복이 당연한 군과 경찰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도덕적 판단보다는 집단에 대한 충성이 훨씬 강조되는 조직 문화와 함께 생계 및 승진에 대한 현실적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언제나 자기 합리화를 하는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기에 무언가 꺼림칙한 행동을 요구받으면 책임을 외부에 전가하며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적 판단을 회피하고자 한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면서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니 비난을 할 수 없다. 다만 도덕 불감증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언젠가는 자신과 후손이 짊어져야 할 무게로 다가올지 모른다.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괴물은 괴기스러운 형태가 아닌 바로 평범한 인간이 거부하기 힘들면서 복종하게 만드는 힘, 즉 권력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힘을 가진 자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며 강력한 군주를 이상화하였다. 강한 권력자는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당장의 힘에 취해 국민을 억압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권력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권력이 괴물이 된 순간 성 게오르기우스는 칼을 들고 용을 무찌른다.


바다의 표면은 잠잠한 듯 보여도 수면 아래에는 거대한 고래가 헤엄치고 있다. 학창 시절 칠판 위 학급 표어는 < 널 지켜보고 있다>였다. 각자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고래가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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