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릇푸릇한 잎사귀가 안개처럼 흩날리는 당근밭에서 잡초를 뽑는다. 장마철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성장한 당근은 묵직하여 쉽게 뽑히지 않지만 뿌리가 깊지 않은 이름 모를 잡초는 그냥 쉬이 뽑혀 버려진다.
텃밭에서 작물이 되느냐 잡초가 되느냐는 사실 농사꾼의 관점에서 보는 편견일 뿐이다. 감자 밭에서 싹을 틔운 당근은 불운하게도 잡초로 취급된다.
그러니 실패로 인해 인생에서 잡초가 되었다고 여겨질 때 자존심이 상해 좌절하기보다는 자신의 본질적 가치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자존심(自存心)이 소유적 가치로부터 나오는 마음이라면 자존감(自存感)은, 자기 긍정의 존재적 가치로부터 나온 감성이다. 남이 인정할 때 생기는 것이 자존심이라면 자긍심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자존심이 상하면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솟게 된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며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 자신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변변치 못한 현실에 대한 자각을 통한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냉혹한 정글의 실사판이다. 모든 인간은 상위 포식자가 되기 위해 나면서부터 경쟁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정글은 풍부한 먹잇감을 제공하고 대다수의 초식동물과 소수의 육식동울로 나누어진다.
초식 동물은 비교적 먹이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도망을 다녀야 하고 육식 동물은 힘들게 사냥을 해야 목숨을 부지한다. 초식 동물은 무리를 지어 자존감을 얻고 육식 동물은 사냥한 것을 씹어 뜯으면서 자존감을 얻는다.
자존감을 높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초식동물에게는 육식 동물의 치명적인 이빨이 불안의 이유요 저주이겠지만 육식동물에게는 자존감의 아이콘이 된다.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나만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란 결코 남과 비교하고 비참해하거나 반대로 오만하지 않으며 소유물의 많고 적음에 동요하지 않고 겸손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상으로는 자존감이 높아지고 불안이 감소할 때 행복이 상승한다. 그저 매일의 평펌한 생활이 편안해질 수 있다. 미디어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현재가 편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피할 수 없을 듯한 그들의 가난한 미래가 먼저 보인다면 자신의 불안함이 그대로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이미 나 자신에 있다. 지천에 널린 세 잎 클로버의 꽃발은 행복이다. 돌연변이인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은 어쩌다 발견되는 희귀한 케이스다. 행복은 이미 삶의 형태로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성숙함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내일은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평범한 하루를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