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황혼 무렵의 공원에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애견인들이 많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다니는 반려견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사랑이 한가득이다.
그러나 마냥 행복해 보이는 반려견과 달리 정작 주인의 표정은 왠지 우울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물의 식사를 챙기고 잠자리까지 돌보아 주지만 정작 자신 또한 세심하게 돌보아야 대상임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쁜 일상이 갓생(신을 의미하는 '갓(god)'과 삶을 의미하는 '생(生)'을 조합한 신조어)으로 불리며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까지 잠시라도 자신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시간을 잊고 지내고 있고 그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어지고 있다.
가족이나 주변의 사회 인맥, 혹은 반려 동물을 통해서 인간은 사회적 고립감을 이기고 외로움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이기 들수록 외로움은 인간에게 무서운 형벌로 다가온다. 심한 경우 고독공포증(autophobia)에 빠져 애정 결핍과 무시당하고 있다는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군중 속에서도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해 인간이 개보다 못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현실은 사실 낯설지 않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속담처럼 힘과 권력은 인간과 동물의 사회적 위치마저 바꾸어 놓기도 한다.
경쟁의 대상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될 때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매일 자신에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언제 행복한가'등의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존적인 어린아이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어른으로의 성장이 목표가 될 때 더 이상 고독은 불편함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솔직이 절대 쉽지 않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항상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기억으로 우리 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는 모두 뇌에 남아서 기억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괴롭히고 다가오지도 않을 미래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오늘이 힘들다는 것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더 이상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도록 마음속 어린아이를 잘 다독이자. 그러면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큰 행복을 선물해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