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m’s drawing diary
초반기에 좀 정신이 있을때는 명칭에 대한 고민이나 일본의 황당한 대응을 비웃었었다. 작년에 미세먼지용 마스크를 오십개 정도 구매한 후 약간의 후회를 했더랬는데, 바이러스 유행상황이 되니 쌀창고에 그득 곡식을 비축해둔 것 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신천지 사태만 없었어도 충분했으리라.
남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느라 아무곳도 나가지않는다그러더구만, 우리 부부는 제주로 향했다. 우울하고 끝없는바이러스 뉴스를 씻을 신산하고 향기로운 봄여행이 기대되었다. 덤은 저렴한 여행비다.
성산의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니, 등뒤에선 제주로 피난온 사람들 많다는 현지민들의 수다가 귀에 꽂힌다. 확진자는 제주에 불과 네명, 이정도면 청정지역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의 여행가방 앞에서 거의 드러누웠다. 마치 우리가 우한같은 곳에로 의료봉사라도 떠나는 듯 흥분을 하였다. 너희가 거기가서 병을 옮아오면 젊은 너희는 살지만 늙은 나는 죽을게다, 나는 혼자 죽진 않을꺼라며 울부짖었다. 당혹...
어머니에겐 유독 공포가 하나 있으니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에 대한 것이다. 연세를 드실 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당신의 삶 전체를 장악했다. 건강하게 아흔에 가까이 사셨는데도 생에 대한 집착은 젊은이들의 그것보다 갈수록 비대해져 간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영속한 삶을 방해하는 그 모든 것은 죄악에 다름아니다.
바이러스 소식이 들리자 바로 어머니는 길고 지루한 낮시간을 견디러 다니는 노인주간보호센터의 발길부터 먼저 끊었다. 하루종일 고독의 시간을 견딜수는 있지만 공포는 이기기 힘든 것이다. 출퇴근 하는 아들의 몸엔 바이러스가 묻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공포를 가지고 멀찍이 떨어져 식사조차 슬며시 먼저 드시곤 했다. 자신이 살고있는 공간 바깥은 모두 바이러스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견디기 힘겹겠는가. 그러한 와중에 자식들의 ‘여행’이라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의 연장이 아니라, 휴식의 다른 모습인 여행이라니.
곳곳을 돌아다니는 그네들의 몸에 바이러스 범벅이 되어 집으로 들어오고야 말것, 그리하여 전염병 사망자의 장례식장엔 죽음을 애도하는 손님조차 모든 발길을 끊는다는 그, 외로운 죽음을 기어코 맞이하고야 말것이라는 공포를 온몸으로 체험중인 것이다.
기실 그녀의 아들은 불효자를 선언했다. 누구도 엄마에게 맞춰 살려면 정상적으로 살수없다는 그의 주장에 더불어 나역시 은근슬쩍 무언의 동의로 묻어간다. 신념 너머까지 효를 다할 수 없다. 당신만의 삶의 태도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삶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우리가 인간의 죽음같은 운명을 거머쥘 수 없듯이, 타인의 공포를 대신하여 살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녀는 공포를 마주보며 집안에 있고 나는 공포의 전염에 반대하며 여행을 하기로 한것이 오늘의 불효선언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