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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M Jun 11. 2021

교보문고 어슬렁 단상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광화문 한 복판에 있었다. 당시엔 종로2가에 위치한 종로서적이 대형서점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그곳에 필적할 만큼(아니면 더 큰) 서점이 광화문 사거리에 문을 열었다. 그것이 교보문고였다. 여고생들이 다니기 딱 좋은 곳이었다. 큰 사거리를 건너 지하로 연결된 놀라운 세계였다. 안타깝게도 문학이나 아름다운 책의 세계에 빠졌던건 아니고,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건 '모닝글로리'라는 문구센터였다.  볼펜이나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흐릿한 회색선의 노트 따위를 고르고, 책을 (읽기보다는) 구경하던 멋진 장소.


그 후로 오백년쯤 되었을까.(나의 '오백년된' 이라는 단어는 미혼시절을 건너온 이후를 일컫는 수사법인데, 워낙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삶의 궤적이 전혀 연결되고 있지 않은지라, 오백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자  늘 쓰는 단어다.)  뻔한 교보문고의 공간내 동선이 눈앞에서 뱅글뱅글이다... 


머릿속엔 정확히 교보문고 공간이 그려져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곳에선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갈 때마다 책의 주제별 코너와 문구점과 음반가게와  잡화점과 푸드코트들의 위치가  바뀌기 때문이다. '자주'라는 말은 거길 다닌지 삼십년이 넘었는데, 들를 때마다의 '자주'다. 사랑하는 마음과는 달리, 사는 곳이 경기도니 그야말로 몇년에 한번 들를까 말까 하니 말이다.(대학때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했다. '훗날 날 만나고 싶으면 주말에 교보문고를 와서 돌아다녀봐. 그럼 나를 만날꺼야..' 뭐냐 이 밑도 끝도 없는 미래상은. 오늘날, 주말의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나를 절대 만날 수 없다. 만나려거든 전화를 해야지.) 


그러나 저러나 어슬렁 감상평은 그러하다.

참.. 그만그만한 책들이 이쁘게 잘도 만들어져 엄청난 양으로 발간되고 있구나...

아.. 그런데 왜 그럴까.. 예쁘고 예쁘고.. 예쁜데, 손이 안 감긴다. 책에.


작년에, 책을 써보겠노라고, 나름의 컨셉을 가지고 저작에 도전한 일이 있었다.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어떤 앱 사용법 책을 만들고 싶었다. 아주 쉬운 앱이었는데, 자주 쓰다보니 분명 필요한 기능이 있는것 같은데, 어디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아 이런 책이 있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되었다. 사전식으로 나같은 사람을 위한 책을 써보자...  


초고를 전달받은 홍대앞의 한 출판사에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그런데 말이다. 계약도 시작하지 않은 채, 여러가지 요구를 내게 하기 시작했다. 책을 많이 팔기위해선 요렇게 요렇게 바꿔라, 그림도 바꿔라, 내용도 바꿔라.. 처음으로 책을 쓰고자 한 내게 지인은 조언했다. "다 맞춰줘. 그게 맞어."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그들이 원하는 지점과 내가 원하는 지점은 달랐고, 나는 결국 길을 잃었다. 그림도 엉망이 되어갔고, 글도 엉망이 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출판사에서는 초짜 편집인을 내게 붙여주었고, 그녀를 믿었던게 나의 불찰이었다. 자신이 원하는게 뭔지 모르는 기획자가 이끄는 곳으로 절대 끌려가면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즈음, 이 책을 출간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나를 이리저리 휘두르던 사이, 그들이 원하던 스타일의 책이 이미 나와버린 것이었다. 이런.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 글을 다 팽개쳐 내버려두었는데, 오늘 서점에 가서 느낀 점은, 여전히 내 생각은 옳았고 내가 원한 타겟과 그들이 원한 타겟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겐 "이렇게 해야 잘팔려"라는 공식이 있었고, 나의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공식에 잘 맞는 AI가 더 맞았으리라. 애시당초 나랑 엮이면 안되는 자들이었던 게다. 그래서 책을 쓰려거든, 그런 기획자를 만나면 안된다는 것, 또, 그런 사람들을 싹 알아보고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심지를 지녀야 한다는 것 정도를 배우고, 입맛이 딱 떨어졌다. 나는 그 일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보문고를 어슬렁 거리며 '아 참, 책들이 별로구나... 어쩜 이리도 들쳐보기 조차 싫단말인가!  왜 다 이다지도 비슷비슷한것인가.' 뭐 그런 생각들. 그 생각들이 오늘 작년의 그 출판기획자가 생각나게 한다. 돈벌이의 공식들.

...

유행은 옷에만 있지않다. 온통이다 온통. 흉내내기의 세상.

흉내내기에서 날 좀 구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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