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얼굴 보는 지인이 술자리에서 내게 한 말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얼굴은 충분히 잿빛이었고, 머리카락은 이발을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축 늘어져 더 힘없어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헐렁한 핏 바지가 유행인데 그분의 헐렁한 바지는 왜 그렇게 처량해 보이던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중년 가장의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우리는 가끔 떠나고 싶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 책임과 도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주어진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훨훨 가벼워지고 싶다. 누구에게나 이런 마음은 불쑥 찾아온다. 특히 중년 가장은 더 자주 느낀다. 피곤과 지침은 쌓여가지만 대부분이 그렇듯 쉽게 이탈할 수도 없다. 한참 성장 중인 자녀가 있고 외벌이라면 더 무게감은 크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수입이 불규칙하다면 물먹은 담요를 뒤집어쓴 것처럼 삶은 무겁다. 버거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지 않겠나.
우리 문화는 나보다는 남의 눈치를 살피고 사회적 인식의 규범에 부합하기를 강요받는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무능한 아버지가 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심적 부담도 안고 산다.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 자신을 나무란다. 외부의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금수저를 만들도록 키우기보다는 금수저 부모가 아님을 미안해하며 끝도 없는 책임에서 지쳐간다. 그러다 그러다... 현실을 떠나 이동하고 싶어 진다.
삶의 가치를 내 안의 나에게 둬야 한다. 내가 아닌 외부의 시선에 둔 삶은 건강하게 여물지 않는다. 같은 일, 같은 현상이라도 무게감이 다르다. 시켜서 하는 일은 쉬이 지친다. 의무 때문에 하는 행동은 오래갈 수 없다. 사회적 시선에 반응한 행동은 마음의 풍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미소가 마르고, 윤기 없이 칙칙해지고, 어깨가 쳐진다. 처량한 공기가 주변을 채운다. 자발적 자아에서 출발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나의 선택으로 건강해지거나, 지쳐서 쇠퇴하 거 나다. 가정을 위해,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살지 않아야 내 삶이 탄탄해진다. 나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 가족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거다.
내 삶에 가족이 있는 것이지, 가족을 위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면 현실에서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든다. 내게 집중한 삶이라면 힘듦은 훨씬 가벼워진다. 나를 중심에 둔 마인드셋이 장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있는 ‘불편함’은 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한 순간일 뿐이다. 내 건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공정과정이다. 어려움 또한 마찬가지다. 헤쳐나가야 성장한다. 인간의 가장 큰 에너지원은 성장으로부터 기인한다. 성장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한 존재가 인간이다. 성장으로부터 성취감을 느끼고 자아실현의 상위 감정을 만끽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편안함’에 도달하고자 어려운 현실을 버텨내려 한다면 잘못된 설정이다. ‘편안함’은 성장의 가장 강력한 철벽이다. 알다시피 편안한 성장은 없다.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이동이 필요하다. 장소의 이동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이다. 결국 내 삶에서의 도피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사회적 관념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지자. 내 삶을 부여잡고 내 삶에 집중하자. 나를 들여다보면 내가 보인다. 발견하지 못했던, 챙기지 못했던 내 자아가 보일 것이다. 나를 챙기는 순간, 내 발걸음을 무겁게 했던 물먹은 담요가 마르기 시작한다. 바짝 말라 뽀송해진 담요는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하게 해 주고 바람과 추위로부터 내 체온을 지켜줄 것이다. 나에게 집중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