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5. 엄윤정

배우라는 직, 연기라는 업

by 유유

이번 달에 만난 세계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엄윤정 님입니다.



‘직업’이라는 말에서, 직은 자리인 직책, 업은 수행하는 일인 직무를 의미하곤 합니다. 누구도 다 알지 못할 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직과 업의 조합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그중 배우라는 직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인지도에 있어 조금 독특합니다. 모두가 존재를 아는 ‘직’인 반면, 생소하게 느끼는 ‘업’인 것 같거든요.


윤정은 소속사 없이 혼자 일을 찾으면서 일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프리랜서와 비슷합니다. 일할 기회를 찾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성장하고자 노력하고, 맡은 바 최선을 다한 뒤, 또다시 다음 일을 모색합니다. 그러면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맞는지 계속 점검하고, 자신만의 특별함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실력이 충분한지 번민하기도 합니다. 면접 대신 오디션을 보면서요.


그러던 윤정에게 작년 말, 번아웃이 찾아왔어요. 가만히 쉬는 방법을 몰라서 배워야 했을 만큼 멈추지 않고 움직여온 그에게 꼭 일시 정지가 필요했습니다. 긴 공연 사이에는 쉬는 시간인 인터미션이 있지요. 이어질 여정을 다시 기쁘게 맞이하기 위한 인터미션 뒤, 새 막이 열리면 다시 설레기 시작합니다. 한 해 동안 몸과 마음을 잘 돌본 뒤 다음 막을 시작한 윤정을 만나 그의 일에 관해 물었습니다.


깊고 넓은 세계를 다 담지 못한 저의 부족함이 아쉽지만 다음 인터뷰를 기약하며,

배우 엄윤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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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정 님 인스타 @yunjeong.e


1.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
2. 희극인을 꿈꾸던 아이
3. 배우를 따라 움직이던 시선
4. 살아내는 삶을 살아가는 삶
5. 어쩌면 내 꿈은 늘
6. 지지하고 기다려준 모든 마음 덕분에



1.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


윤정이가 하는 일을 소개해 줄래?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연기하는 일을 하고 있어. 내 생각에 배우는 언어로 창조된 어떤 인물/캐릭터/존재를 살아내는 직업인 것 같아.

‘살아낸다’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모습은 그 캐릭터의 일생에 비해서 지극히 일부일 수 있잖아. 배우는 그 일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캐릭터의 삶 전체를 살아내야 하는 것 같아.


이 장면이 있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대본 속에서 그가 뱉은 말, 보이는 행동,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일련의 사건들을 가능한 한 놓치지 않고 짚어 가면서 그가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성격과 가치관을 형성해 왔을지, 그래서 지금 놓인 상황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반응하고 움직일지를 따라가 보는 거지.

때로는 존재의 탄생부터, 현재, 그리고 이후에는 어떤 삶이 이어질지까지 고민하곤 해.

여전히 미숙하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뜨문뜨문한 자취를 따라 하나의 커다란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걸 잘 표현해내는 것까지가 배우의 일이라고 생각해.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그 방식은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윤정은 요즘 주로 어느 환경에서 일해?

촬영에 있어서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역을 가장 많이 하고 있어. 웹드라마 촬영도 하고, 광고 서브 모델로도 활동해. 때때로 기회가 되면 다양한 형태의 무대 공연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알바도 하고 있어.



2. 희극인을 꿈꾸던 아이


배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어릴 때부터 희극인(코미디언)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알고 있어.

중학교 때부터니까, 거의 10년 정도네. 공채 시험도 보고, 극단에도 잠깐 있었어.


희극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

이상주의자여서 그랬던 것 같아. 지금도 그렇지만.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랐어. 나 혼자 말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분위기 메이커를 동경했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 그러던 차에 KBS <개그콘서트>에서 ‘뮤지컬’*이라는 코너를 보고 완전히 꽂혀서 꿈이 분명해졌어. ‘저런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면서.

*KBS 코미디 공개 무대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속 코너. 뮤지컬 형태로 매주 하나의 노래를 정해 곡에 맞는 상황극을 보여주었다.


'저런 코미디언'은 어떤 코미디언이야?

사람들을 웃게 하면서 감동도 주는 사람, 그 웃음에 때로는 어떤 메시지를 담아 공유하는 사람. 그게 바로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어. 웃음을 주는 것만으로도 참 바르고 옳은 일인데, 감동과 메시지까지 던져준다니. 내가 정의로운 것에 강하게 끌리거든. 거기에 반해서 그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어.


희극인 공채 시험도 봤다고?

대학교 4학년 때, 아무도 모르게 혼자 KBS 시험을 봤어. 개그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 어찌저찌 서류 합격하고 2차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PD님들이 나에게 기회를 많이 주시려고 했던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개그를 하는 내게, 계속 다른 걸 더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거든.

이것저것 하다가, 마지막엔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내가 생각해도 진짜 별로였어.(웃음) 그리고 나오면서 깨달았어.

지금까지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 전혀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았구나. 나는 코미디가, 개그가 뭔지 전혀 모른다.’

부끄러웠어. 배우러 어디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개그 극단에 들어갔어. 극단의 막내 기수일 때, 다시 공채 시즌이 되어서 방송국 3사에 지원했는데 그중 tvN 3차 최종까지 가게 됐어. tvN은 최종 전형에 올라온 지원자를 다 모아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그때 거기 올라온 사람들을 보면서 멋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아,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개그가 아니었구나.’ 확신하게 됐어.


사실 일찌감치 내겐 재능이 없음을 알아차렸지만, 느리더라도 계속 배우고 익혀간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아. 그런데 막상 개그에 대해 진짜로 배우고 알아갈수록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정말 이게 맞나?’하는 의문이 반복됐어. 점점 행복이, 꿈이 잘 그려지지 않았거든. 근데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잖아.

희극인이라는 꿈을 꾸는 동안, 반대하던 부모님과 나 스스로에게 늘 했던 이야기가 있어.

“이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면 미련 없이 돌아설 용기를 내겠다. 10년 동안 꿈이라고 말해온 내게, 누군가 포기 혹은 도망이라는 평가를 한대도 괜찮다.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


내 각오 중 가장 비장했지. 오랜 꿈이었던 만큼 단번에 돌아서기 어려웠는데, tvN 공채 시험을 치르면서 마음도 생각도 한번 더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어. 그 모든 시간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개그를 사랑하고, 희극인을 존경하며, 내 자리에서 연기해 나갈 수 있는 것 같아.



3. 배우를 따라 움직이던 시선


그 뒤 어떤 과정을 거쳐 배우의 길에 들어섰어?

그때부터, ‘이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어. 그때 연극 조연출로 일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 내가 일을 쉬고 있으니, 이번에 준비 중인 작품에서 스태프로 일해줄 수 있겠냐고. 조명을 다루는 스태프로 들어가서 그냥 모든 걸 관찰했어. 배우, 연출, 조연출, 무대 감독 등 많은 구성원이 일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한 귀퉁이에서 팔로우 조명(*배우를 따라 움직이며 비추는 조명)을 담당했었는데, 배우들의 타이밍과 속도에 맞춰 조명을 움직이는 것도 상당히 긴장되고 재미있었어. 조금 일찍 가서 청소도 하고, 극장도 돌아보고, 이것저것 관찰하면서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려고 했어. 인사도 열심히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분이 계셨어. 사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뭐든 성실히 했던 건데 그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 같이 했던 작품이 끝난 뒤 그분이 속한 극단에 불러주셨어. “우리 극단에서 같이 해보지 않을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극 극단에 들어가게 됐어.


무슨 일을 제안하신 거야?

“극단에서 같이 한다”는 말은 극단의 구성원으로서 작품 만드는 일을 같이한다는 뜻이야. 배역이 주어질 때는 연기를 할 수도 있고, 스태프가 필요할 때는 스태프 일을 할 수도 있어. 그래서인지 “같이 일해보자”보다 “같이 해보자”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 극단마다 시스템은 다르겠지만.


그곳에서 연기도 했어?

거기에선 단 한 번도 연기를 하지는 않았어. 기회를 여러 번 주셨지만, 계속 관찰자를 자처했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아.

대신 배우의 연기와 호흡을 따라가야 하는 음향이나 조명 스태프 일을 가장 좋아했어. 그땐 그냥 연기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싶었나 봐. 그러다 매체 연기*를 배우기로 결심하곤 연기학원을 등록했어.

(*매체 연기: 카메라를 통해서 하는 연기. 대체로 무대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는 연기와 구분.)


관찰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어서 매체 연기를 배우기로 했어?

개그 극단을 나오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나는 왜 그 긴 시간 동안 개그가 하고 싶다고 생각해 왔을까 고민했어. 그러다 연극을 관찰하면서 조금씩 깨달은 것이, 어쩌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부터 도망쳐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였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청소년 시기에 연극동아리에 들어 갔던 나, 대학에 진학해서는 공연영상학부를 선택했던 나 등 지난 시간 속에 서 있는 나를 살펴 봤어.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건 진짜로 행복한 일이긴 했지만, 돌아보니 행복이 가장 컸던 순간은 어떤 작품에서 한 역할을 맡아 펼쳐 보이면서 그 역할을 잘 해냈을 때였거든.

그러니까 분명 연기를 하고 싶었음에도, 난 예쁘지 않으니까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던 건가? 그래서 꿈꾸지도 못했었나? 싶더라고. 이건 스스로도 정말 별로더라.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솔직해져 보자 싶었어. 그리고 연기하는 일 중에서도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에 도달해서 매체 연기를 배우러 갔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어?

연기 학원에 다니다가 29살 때쯤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고, 광고 모델이랑 단역으로 촬영을 시작하게 됐어. 그리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



4. 살아내는 삶을 살아가는 삶


매체 연기라는 일을 하는 지금, 윤정의 일에는 어떤 기쁨과 슬픔이 있어?

우선 기쁨은, 어떤 한 캐릭터를 알아가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가는 데에 있어. 그 캐릭터를 창작한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 특히 기뻐. “정확하게 이해했다”거나, “그 캐릭터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 내가 발견하고, 살아낸 캐릭터가 창작자가 생각했던 캐릭터에 부합한다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고 말해주는 순간이야.

반면 슬픔 역시 내가 캐릭터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찾아와. 그중에서도 가장 슬픈 순간은 캐릭터의 삶이 머릿속에서는 따라가지는데, 그걸 표현해 내지 못하는 나를 마주할 때야. 연기력의 부족이지.


그 슬픔은 어떻게 극복해?

나도 몰랐는데, 감독님과 조연출님, 주변 선배들, 동료들을 붙잡고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극복해 왔더라고. 돌아오는 대답이 비슷했어. 나보다 더 나를 믿어주면서, 나를 선택한 이들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했어.


“네가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뽑은 감독님과 팀을 믿어 봐. 너에게서 무엇이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너를 선택했고, 그래서 너와 함께 일하는데, 그들의 안목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말도록 해.”

그 말처럼 나를 신뢰하는 이들을 믿고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어. 그리고 불안해질 때마다 주변에 더 도움을 청하기로 했어. 내가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아닐 땐 아니라고 꼭 말해달라고 하면서. 물론 계속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겠지.


어떤 방법으로 실력을 키우고 있어?

혼자 훈련도 하고, 여럿이 스터디 모임도 해. 스터디 모임에서는 다른 배우들 혹은 지인들과, 각자 하고 싶은 연기 훈련을 함께 하거나, 혹은 특정 책의 순서를 따라 스터디를 해왔어.

예를 들면 시나리오에는 있지만 영화에는 영상화되지 않은 씬을 찾아서 연기하거나, 특정 영화의 캐릭터나 장면의 배경이 되었을 법한 이야기(전사)를 직접 구상해서 펼쳐 봐. 때론 웹툰에서 독백 장면과 대사를 찾을 때도 있어.

그리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해. 좋아하기도 하지만, 정신과 신체 관리 측면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경험의 폭을 넓히려고도 해서, 다른 사람의 취미를 같이 향유하면서 그걸 즐기러 온 사람들도 관찰하곤 해. 만약 전시 보러 가는 걸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전시도 보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관찰하는 거지.

윤정의 운동일지 @_oreugi

또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고 노력해. 인간의 본심과 내심이 무엇일까 탐구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곧 나니까. 때로는 내가 이렇게 치졸하고 치사한 사람이었나 싶은 대답을 내놓을 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자문자답하려고 애써. 덕분에 연기를 하면서 ‘사람 엄윤정’에 대해 더 세밀하게 알아가고 있어. 동시에 계속해서 변해가지만.


배우마다 더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윤정이 자주 맡는 역할이나 캐릭터 특징이 있어?

지금까지 난 특히 기자 역할이 많이 주어졌었고, 군인처럼 제복을 입는 직업군이나 의사 같은 전문직 캐릭터들에 캐스팅 연락이 많이 왔어. 공통적으로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캐릭터, 규범과 규율에 익숙한 캐릭터들인 것 같아. 내 본체와 달리.


본체와 많이 달라?

사실 난 내가 그렇게 영민하고 똑부러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허술하고 부족한 데가 많은 것 같은데, 오히려 치밀하고 촘촘한 역할을 맡고 있어.


연기를 시작했을 때, 처음엔 재밌는 감초 역할을 하고 싶었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게 익숙했겠지. 그런데 맨 처음 프로필을 돌리기 시작하고 나서 1년 동안은 아예 오디션조차 잡히지 않는 거야.

그러다 가물에 콩 나듯 들어온 오디션에서 어떤 조감독님이 그런 얘기를 해주셨어. “윤정 씨는 이런 역할 말고, 좀 세고 강렬한 역할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떠냐”라고. 솔직히 말하면 내 이미지에서 밝고 유쾌한 캐릭터가 기대되지 않는다고 했어.

그 후에 프로필을 그분 말씀대로 조금 달리 찍어봤어. 그때부터 오디션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강한 사람, 혹은 지적이고 치밀한 전문직 종사자 같은 역할로.


사람들은 왜 그 이미지로 인식할까?

내가 가진 외적인 이미지가, 날카롭고 센 캐릭터를 기대하게 하나 봐.


그 간극을 좁히고 싶어?

예전엔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질 기회라고 생각해. 한때 기자 역할만 계속하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해서 도망치고 피해 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 이미지만큼이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해.

사실 기자 역할이 쉽지 않거든. 대사가 길지 않더라도 일상 용어가 아닌 표현을 많이 쓰기도 하고, 정보 전달의 목적을 띠는 대사를 정확하고 빠르게 말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때때로 현장에서 대사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실수할 확률이 높아. 그래서 실제로 현직 앵커나 기자를 뽑기도 하고, 기자 역 경력이 있어야 캐스팅이 되는 편일 만큼.

한번은 전현직 앵커와 기자분들 사이에서 나 혼자만 배우였던 날이 있었는데, 다들 나를 기자 출신이라고 생각하시더라고. 그분들 일터 방송국에서 마주쳤을 것만 같은 비주얼이라고 하면서.(웃음) 그만큼 모두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내 이미지가 어떤 역할에 받쳐준다면, 그걸 장점 삼아 제대로 부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5. 어쩌면 내 꿈은 늘


꼭 한번 찍어보고 싶은 작품이 있어?

아주 분명히 있어. 스포츠물*을 내 생에 한 번은 꼭 찍어보고 싶어.

*스포츠물: 스포츠를 중심 주제로 다루는 창작물. 주로 팀의 성장 이야기를 그리며 끈기와 열정, 화합 등의 정서가 포함된다.


왜?

내가 스포츠물을 정말 좋아하거든. 거기엔 희로애락이 다 있고, 특히 응집돼 있어. 어떤 종목이든, 스포츠물은 항상 나를 일으키고 심장을 뛰게 한다…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어떤 열정과 에너지를 한 번에 끌어올려 주는 것만 같아. 살아가는 데에 용기를 줘. 해피엔딩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런 힘을 주는 작품에 나도 한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계속.


어떤 역할을 하는 캐릭터?

역량이 된다면 선수 역할도 너무 좋겠지만, 코치 등 다른 역할도 무엇이든 모두 좋아.


스포츠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고른다면?

단 하나를 고르라면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이야. 최신작으로는 드라마 <스토브리그>(2019)도 좋아하고, 영화 <퍼펙트 게임>(2011)도 좋아해. 만화/애니메이션이지만 <슬램 덩크>(1993~)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중 하나를 리메이크한다고 하면,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선수팀 막내인 ‘장보람’ 역에 유난히 눈이 갔던 건 천재 유망주 역이어서였을까? 신구 세대 화합을 보여주는 역할이라는 점도 좋은데, 특히 차민지 배우님이 정말 매력적이었어. 지금은 연령대가 맞지 않아서 어렵겠다.(웃음)

김지영 배우님이 연기한 ‘송정란’ 역할도 좋아. 그 영화에서 다른 캐릭터에 비해 ‘희(喜)’가 있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해. 괄괄하다고 말할 만한 유쾌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송정란’만의 슬픔도 있어서 작품을 보면서 개인 서사가 기다려졌던 캐릭터야.



6. 지지하고 기다려준 모든 마음 덕분에


요즘 찍고 있는 작품이 있어?

작년부터 웹시트콤 <논스톱으로 하이킥>에서 ‘강한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데, 이제 마지막 화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어.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독립 단편영화 <엽기적 모텔 데이트>에서 ‘선우’ 역을 맡게 되어서 촬영을 준비 중이야. 연말에는 연극 <다우트>에 스태프로서 참여하기로 했어.


사실 시트콤은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여서 <논스톱으로 하이킥>이 엄청나게 반갑고 고마운 작품인데,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작년에 번아웃이 크게 와서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상태를 난생처음 경험했고, 그런 나 자신이 생경한 때에 출연 제안이 왔거든. 직업인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그래서 완전히 집중하지도, 더 깊이 고민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 제작팀인 ‘이치’ 식구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받아주고 지지해 준 팀 덕분에 번아웃의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었어. 배우로서 작품 활동을 놓지 않을 수도 있었고.


아쉽다는 피드백을 들었어?

그렇진 않지만 혼자서 미안했어. 촬영장 분위기가 정말 좋아서 촬영하는 시간은 언제나 좋았거든. 출연진부터 스태프까지 모두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실력도 뛰어나서 계속 배우고 자극받았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처음부터 그만큼 ‘강한나’(배역 인물)로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 같은 거지.


그럼 지금 준비 중인 <엽기적 모텔 데이트>는 어때?

특별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야. 실은 지원 기간이 끝난 뒤에 모집 공고를 발견해서, 평소 같았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어. 그런데 불륜 남편을 처단하는 시놉시스(줄거리)가 너무 재밌는 거야. 담당자 메일주소를 알아내려고 추적하고 또 추적한 끝에 찾아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연락이 닿아 오디션을 볼 수 있었어. 작품에 매력을 강렬하게 느껴서인지 즐거운 마음이 가득한 채로 오디션을 봤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

더 감사하게도 작품에 함께하게 되어서 아직도 신기하면서도 설레고, ‘선우’(배역 인물)를 요리조리 잘 살펴보고 알아가는 요즘 계속 두근두근해. 이 마음 그대로 촬영도 재미있게 하고 싶어. 물론 잘해야겠지!


연극 스태프 일도 계속 해?

연극은 함께 만들어 가는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든든해지는 마음이 들어.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기꺼이 하게 돼. 음향이나 조명 담당, 현장 안내 등 함께 하자는 연락이 오면 “꺅”하며 기뻐할 정도로 신이 나. 오랜만에 무대 옆에서 관찰자가 되어 전체를 관찰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누리고 싶은 소소한 즐거움이야.


어떤 너이든 늘 응원해.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사 중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대사가 있다면 알려줄래?

전에 웹소설 <배우로서 살겠다>를 읽다가 한 구절 적어둔 것이 있어.

“준비된 배우는 언제든 연기할 수 있다. 허나 마음속 한편이 공허하게 비어버린 배우는 언젠가 금이 생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잘 채우고, 지켜나가는 것이 실력을 갖추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깨달아가던 때에 만나 더 공감된 구절이야. 그런 점에서, 대사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나에게 이런 말도 남겨 볼게.

“천천히 준비되더라도 마음을 잘 채우고 지키며, 언제나 감사함으로 연기하길 응원해!”



2024.11.

인터뷰이 엄윤정 , 글 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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