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워지지 않은 사이임에도 내 고민을 입 밖으로 꺼낸 건 나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참을 수 없는 구토가 터져 나오듯 그렇게 말이 줄줄 흘러나왔다.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미 밀려 나온 후였고, 불안과 혼란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그 고민이 시작된 건 자그마치 10년도 넘었다. 취업이 잘 된다는 주변의 권유에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은 하면 할수록 내 길이 아니라는 확신뿐이었다. 5년 차쯤 되자 내 길을 찾고 싶다는 마음은 극에 달해 덜컥 일을 그만뒀다. 그 무렵 유행하던 워킹홀리데이에 꽂혀, 호주에 가겠다는 말을 호주행 비행기표 가격을 알아보지도 않고 외치고 다녔다. 왜 하필 워킹 홀리데이인지 그럴싸한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그 의지는 새로 생긴 남자친구와 내 입맛에 딱 맞는 직장에 입사하면서 아주 쉽게 꺾어졌다. 그렇게 '내 길 찾기'는 오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임신으로 인해 어딘가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완전한 안정이 갖춰지자,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구체적으로 고심을 시작한 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직장이 문을 닫을 위기가 찾아왔을 때부터였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까 '내 길 찾기'는 당분간 보류해야겠다는 안일함 속에 지내다가 찾아온 작은 난관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란 없구나. 지금 준비를 해놔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나중에'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일단 떠오른 것은 글쓰기였다. 예전에 우연히 글쓰기 모임에 갔다가 몇 편의 글을 썼었다. 모임 안에서도 반응이 꽤 좋았고, '칭찬을 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고질병에 걸린 남편이, 지원을 해줄 테니 열심히 해보라는 뜻밖에 칭찬에 나는 신이 나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 뒤로 틈틈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이것 또한 육아라는 핑계로 다시 '나중에'로 미뤘다.
육아 중에 파트타임으로 짧게 일할 수 있는 곳은 찾기가 어려웠다. 찾게 되더라도 이런 위기가 찾아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글쓰기를 열심히 시작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조급한 상황에 맞닥뜨리자 차분히 앉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발 벗고 나가 고되게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오히려 무기력 해졌다.
그렇게 초조한 게으름으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우연히 한 일자리 공고를 보게 되었다.
어린이집 특강 강사 모집합니다.
-월~금
-10:30 ~ 16:00 협의
-시급 42,500원
-아이들을 사랑하고, 열정적이며, 책임감 강하신 분이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낸 시간에 잠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시는 분이라면 오세요!
별도의 자격증도 필요 없고 차량 소지한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으며,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잘 다룬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정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다.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서 어떠한 시도나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주제넘은 저울 재기를 시작했다. 글쓰기냐 어린이집 특강강사냐.
어떤 것이 나의 현재 상황에서 가장 적합할지, 적성에 맞을지,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을지 다양한 것들은 고민해 가며 비교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시도나 행동 없이 머릿속으로 하는 고민은 잡념이나 망상에 가까웠다. 주위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딱히 그 분야에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초조함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라서 일단 글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켜고 몇 줄을 쓰다가 다시 어린이집 강사 공고를 들여다보고 이력서 파일을 수정해 보기를 반복했다. 새로운 일을 찾겠다고 10년이나 꾸물 거렸으면서 왜 이제 와서 발등에 불이 붙어 조급해하는지 자괴감에 몸서리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 차리겠다며 두 눈을 부릅 떴다.
아이를 하원시키고 어느 때처럼 놀이터로 향했다. 요즘 글쓰기와 이런저런 상념을 하느라 평소보다 어린이집 하원을 늦게 했더니 못 보던 아이와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늘 그렇듯 아이가 몇 개월이에요?로 그 아이의 엄마와 안면을 트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엄마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졌었다. 그리고 세 번쯤 마주쳤을 때였을까 내가 하는 말에 큰소리에 웃어주고 공감해 주는 그녀의 리액션에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고민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몇 번 마주치며 육아 관련 이야기만 몇 번 나눈 사이에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고는 있는데, 모르겠어요. 고민이 많아요"
"오오 글을 쓰신다니 너무 멋지신대요? 원래 전공이 그쪽 이신 거예요?"
"아니요 원래 전공은 전혀 다른 쪽이에요. 그런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보람을 느끼는 일을 찾고 싶어서요."
나의 진지한 이야기에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차근히 들어줬고, 아이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들을 찾지도 않고 미끄럼틀을 앞으로, 거꾸로, 누워서 타며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가, 놀이터 바닥을 하염없이 뛰어다니다 굴리다가를 반복하며 '이야기장'의 맥을 이어줬다.
"아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당근마켓을 하다가 우연히 구인 공고를 보게 됐는데요..."
"아~ 네네."
"어린이집 특별활동 강사를 모집하는 글이 있더라고요. "
"어린이집 강사요?"
"일반 강사 말고 특별활동 강사요. 그... 오감놀이나 인형극 같은 거 어린이집으로 한 번씩 와서 해주는 거 있잖아요. 그 강사는 특별히 자격증도 필요가 없더라고요."
"아 정말요?"
"네 그런데 그 강사 시급이 42500원인 거 있죠? 괜찮지 않아요? 근무시간도 애 어린이집 보내고 하면 되는 시간대니까...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오오 그러네요?"
그때쯤, 아이들이 우리를 찾기 시작하며 주인을 잘못 찾아간 듯한 고민 상담은 마무리가 되었다.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주책맞았던 과오가 아른거려 마음이 쓰였지만, 칭얼거리는 아이의 보챔과 함께 이내 곧 머릿속을 떠났다.
아이들은 알아서 잘 놀기에 우리는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어지간해서는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아이들 둘이 워낙 잘 놀아 우리 집으로 초대해 놀게 했더니 역시나였다. 오랜만에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히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자, 어색한 공기는 끼어들 틈도 없이 핑퐁핑퐁 수다의 장을 펼쳤다. 아이들의 취침시간이나 어린이집에 관한 주제는 마치 우리가 엄마의 신분으로 육아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처럼 간략하게 마무리 됐다. 그리곤 본가는 어디인지, 남편 하고는 뭘로 자주 부딪히는지에 관해 우리는 좀 더 열을 올렸다.
돌이 안된 둘째 아이도 있는 그 엄마는 내년에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낼지 말지 꽤나 고민스러워 보였다.
"내년에 둘째도 보내고 복직을 할지 아니면 좀 더 휴직을 쓸지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아... 저라면 바로 보낼 것 같은데..."
한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보니 그간 보낼지 말지 걱정한 지난날이 떠올라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휴직이랑 복직이 자유로운 직장이신가 봐요?"
"아... 네 "
그 엄마는 대기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이었다. 수더분한 차림새에 털털해 보이는 성격 탓에 전문적인 커리어 우먼일 거라고 전혀 생각 못했는데, 예상치 못한 그 엄마에 직업에 잠시 잠깐 당황했지만 티가 날까 봐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당황함에 관한 이야기를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 꺼내보였다.
"오빠 그 집 엄마 OO대기업 다닌대. 그리고 그 남편도 대기업 다닌다네?"
" OO 대기업? 이야~ 그럼 둘이 합쳐서 연봉이 2억도 넘을 텐데. 근데 왜 우리 동네 산대? 어디 다른데 집 한 채 따로 또 있는 거 아냐?"
"그런가 지금 집은 전세라던데, 진짜 집은 따로 있나 보다!"
둘만 있으니 속물적인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다.
아 그런데 잠깐만. 둘이 2억도 넘는다고?
순간 놀이터에서 섣부른 나의 고민 상담 사건이 떠올랐다.
'어린이집 강사 시급이 42500원이래요. 괜찮지 않아요?'
아아...
손과 발이 불에 달궈진 오징어 마냥 점점 오그라 들기 시작했다.
4만원이라고만 말할걸 그랬나.
아니면 적당히 시급이 높다고만 했었어도 됐는데...
평소에는 정확하게 잘 기억도 못하고 대충 말하면서
왜 하필 그럴때 철두철미 한건데.
연봉 1억 넘는(추정) 사람한테 2500원이 웬 말이야.
시트콤 같은 그 상황이 한동안 약간의 부끄러운 잔상으로 남아있었지만, 이내 곧 나는 결심을 했다.
이걸로 글을 써야지.
글쟁이에겐 위기도 슬픔도 낯부끄러움도 글감으로 써먹을 아이템이 아니겠는가.
'나중에'를 중얼거리며 따뜻한 방바닥에 고여있기보다는
'42500원'이든 뭐든 맘껏 떠들고 사고 치고 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