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육아하면서 가장 힘든 건 아이를 재우는 일이다. 튼튼이는 신생아 때부터 체력도 좋고 입면이 긴 편이라 재우는 일이 늘 골칫거리다. 그동안은 빡센 일정을 보낸다거나 재울 때 오디오 동화를 틀어준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시기마다 고난을 헤쳐나갔지만 요즘은 지칠 줄 모르는 무한 체력에 이런저런 방법이 안 먹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언제나 한계는 있는 법. 아직 40개월도 채 안되어 낮잠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주말에는 낮잠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낮잠을 재우면서 한두 시간의 휴식시간을 얻기 위해 한 시간의 실랑이를 벌이느니 그냥 신나게 놀리고 빠른 육퇴를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필 오늘 그것을 시행하고자 한 이유는 바로 독박 육아의 날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골프를 치러 간 탓에 나름의 전략을 짜보았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정한 일정은 쇼핑몰 나들이다.
주변 육아 동지와 공동육아를 하는 게 가장 수월한 일정이다만 하필 모두가 다른 일정이 있단다. 키즈카페나 수영장 등 여러 후보들은 순위에 올렸었지만 쉼 없는 장시간 육아에 지치지 않으려면 나에게도 보상이 되는 일정이어야겠다 싶어 쇼핑몰 행을 택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마카롱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중간중간 제공하며 아이에 도파민을 충족시켜 주고 동시에 나 또한 쇼핑의 도파민으로 피로를 씻겨 내릴 생각이다.
다행히 그날따라 마음에 드는 아이템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새 빨간색의 짧은 원피스도 하나 구매했다. 물론 쇼핑의 시간이 녹록지만은 않다. 쇼핑의 시간도 놀이화 해야 장시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걷기보다는 뛰어다녀야 한다.
일명 나 잡아봐라 건법. 쇼핑을 위해 돌아다닐 때 아이가 지치지 않도록 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는 것이다. 엄마 잡아봐라 하고 뛰거나 튼튼이 잡아라~ 하고 돌격하는 퍼포먼스를 틈틈이 해준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다소 민폐가 될 수 있겠다마는 나름의 생존 방식이니 이해를 바라며 철면피를 무릅쓴다.
같은 맥락으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한 번씩 몸을 들썩이며 리듬에 몸을 맡긴다. 특히 옷을 갈아입을 때 아이가 지루할 수 있으므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며 춤을 추면 아이도 덩달아 신이 나서 몸을 흔든다. 그 리듬에 함께하며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점심 메뉴도 직접 고르게 해 주고 식사시간에도 끝없는 수다를 떨며 비위 맞춰주기가 계속된다. 간식도 평소와 달리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4시간 정도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대로 도파민 충전을 하면서 말이다.
2시가 좀 넘자 아이도 슬슬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집에 가기엔 애매한 시간, 그때 쇼핑몰 무대에서 4시에 태권도 공연이 있다는 안내를 발견했다. 사실 오후엔 집 근처 공연장의 합창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었는데, 예약을 깜빡해서 일정이 날아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뜻밖의 대안이 생긴 것이다.
그때까지 한 시간 남짓... 체력이 떨어지고 낮잠을 못 자 헤롱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1시간을 때운다는 것은 액받이를 자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국 마지막 히든카드였던 도파민의 폭발을 위해 쇼핑몰 내 오락실로 향했다. 비싼 물가로 오락 한번 하는데도 지폐를 몇 장씩 잡아먹는 그곳에 그동안 발을 들이질 않았으나 그 광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족히 20분은 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쩍 거리는 조명과 환하게 반겨주는 다채로운 인형들, 뾱뾱챙챙투투투투 등 온갖 된소리가 난무하는 그곳에 입장하자 아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이거지.
오락실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곤 태권도 공연을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이는 이제 졸리고 피곤한 구간을 넘어 무아지경의 구간으로 진입한 듯했다. 완벽하다. 여기서 공연만 보고 집에 가면 금방 재울 시간이다. 아이는 기절할 것이다.
공연이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빼곡해 볼 수 있으려나 걱정했으나 다행히 무대 바로 앞 어린이들만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빈구석이 보여 아이를 그곳에 앉혔다. 그리고 그 뒤쪽 좌석은 아니지만 난간 쪽 걸터앉을 수 있는 곳에 나도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불안한 눈망울로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나를 확인했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안도의 에너지를 보냈다. 튼튼아. 엄마 여깄어.
공연이 시작되자 곧 등장할 태권도 선수에 대한 설명이 먼저 소개됐다. 무려 세계대회 1위의 국가대표선수라고 했다. 우연히 그것도 무료로 세계 1위의 공연을 보게 되다니 이런 행운이 있을까 싶어 다시금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절여진 듯 널브러진 채로 아이를 향했던 자세가 무대를 향해 꼿꼿하게 뻗쳤다. 혼탁했던 두 눈에도 총기도 감돌았다.
공연을 보는 내내 진심의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음악에 맞춰 강단 있게 내지르는 몸사위에 희열이 느껴졌다. 소림사 무술단처럼 하늘을 날아올라 단단한 강판을 팍! 팍! 격파하는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랄까. 쾌감이 들었다. 스포츠를 직접 즐기지 않고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사람들의 말에 그동안은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그날 처음 그 감정을 느껴보았다. 태권도가 유독 나에게 쾌감을 주는 어떤 포인트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시험기간에 뉴스만 봐도 재미있는 심리 비슷한 거였는지 아무튼 관람 내내 몰입과 흥분의 시간이었다.
기술적 대단함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감내하고 노력하며 모진 시간들을 견뎌왔을지가 느껴지니 울컥하기도 했다. 등장한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내 자식 같고 그래서 짠하고 대견한 주책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전략적인 육아를 보내려는 사심 가득한 마음 안에 도파민은 점차 차분한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의 울컥한 감동으로 흘러갔다.
그날처럼 육아를 하다 보면 평소에 나라면 전혀 하지 않을 일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위해 함께 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신기한 건 아이 때문에 접하게 되는 것들에 부담 없이 동참하다 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레고 놀이나 만들기, 여러 구기종목 운동들, 이번에 보게 된 태권도 공연처럼 내가 전혀 관심 없다고 치부한 것들을 의도 없이 가벼이 하다 보면 전부 나름의 매력을 맛보게 된다.
어렸을 적 미술을 너무 싫어했던 나는 (싫어했다기보단 못한다고 생각해 멀리했었던 것 같다.) 작품을 하나도 제출하지 않아 최하점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아이 옆에서 아무렇게나 대충 그리고 만들다 보면 꽤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완성되어 뿌듯함을 느낄 가 종종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결과물을 완벽히 구상하지 않고 그냥 하다 보니 뭐라도 되더라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뛰며 축구공을 빵빵 차다 보면 타격감에 꽤나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 맛에 운동하는구나 왜 그땐 몰랐을까 왜 그땐 못한다고만 생각했을까 싶어 하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축구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육아를 하며 나의 유년시절을 다시 사는듯한 느낌도 든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의 유년시절은 그다지 명랑하지 못했었다. 많은 시절이 외롭고 많은 시절을 머뭇거렸었다. 그래서 나의 아이에게는 천진난만한 나날들이 가득하길 바랐고 그런 날들을 함께 하다 보니 구멍 난 나의 천진도 조금씩 메워지는 기분이 들게 된 것이다.
그날 그렇게 '독박육아'라고 투덜거리며 시작했다 '대박여가'라며 고양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이는 1회 차 나는 2회 차의 유년을 함께하면서...
"고마워 아가, 다시 살게 해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