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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일 Apr 16. 2020

말의 외피





작업 중 틀어놓은 세바시의 강연 중 문득 화면이 궁금해지던 강연이 있었다.

<내 감정을 책임질 때 찾아오는 자유>

이 강연에 앞서 대화법에 대한 다른 강연을 먼저 들었는데

오히려 감정에 대한 이 강연을 듣고 대화란 무엇인지 깊이 와 닿았다.












-

나는 늘 말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품고 비장의 무기처럼 사용했다.

상대를 얕잡아보며 내가 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리하고 날카롭고 똑똑하다. 나는 정확히 파악하고 논리 정연하게 당신의 약점을 찌를 수 있다고.

그것은 가진 것 없는 내가 가진 믿는 구석이었다. 방어이자 공격.

시간이 지날수록 그 뾰족함은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의 말에 부끄러워지기도 하였다.


단순히 말의 외피만 보고 사람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용하는 언어, 말투가 사람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말도 치장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두려움 때문에 거부했던 것들.

그런 것조차 말에 고스란히 숨어있었다. 다만 나로부터 너무 가까워서 당장은 보이지 않았을 뿐.

늘 모르겠다로 결말이 나던 20대 때의 나의 고민들.

그러나 고민으로 떠오른 만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말을 하는 때를 가리거나

상대방의 속마음과 말의 괴리를 파악하거나

괴팍한 습관적 말투에 숨겨진 메시지를 파악하거나

하지 못한 말과 에둘러하는 말이 무엇인지.

행동의 연속성…

말의 외피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대화의 총체적인 면.

결국에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내면이 표현하고 싶은 어떤 것이 말보다 먼저 있다.

여기서 헤아려야 하는 대상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말을 하는 사람의 내면.


나의 역사를 따라가며 알게 된 내 숨겨진 감정과 인정 욕구.

그동안 했던 말들이 부끄러워졌다. 말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왜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말을 해야 했을까?

말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비폭력 대화하기’라는 카피를 들었을 때 나는

’참나, 듣기 좋은 예쁜 말만 하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불만에 가까운) 이 들었다. 

세상의 그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무균 지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말을 말의 외피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외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전문은 찾아보시길-)

비폭력 대화는 나의 내면의 정리를 먼저 해야 했고

그다음 상대방에 대한 헤아림이 있어야 하고

평가가 아닌 관찰한 것만을 표현해야 한다고.


극도로 정제된 이상을 믿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이상적인 말만을 쓰는 사람의 내면은 사실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림자가 어두울 것이다.

그 강박은…

나는 늘 이면이라는 것이 있어서 잘 다스려진 무엇과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나름의 방법들로 해롭지 않게 분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알고 유쾌한 방식으로 분출 혹은 (무려) 좋은 방향으로 전향할 줄 아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 만렙자들의 노련함이 아닐까.


감정으로 얼룩진 말과 글의 도취와

예리한 말과 글의 카타르시스를 떨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일기장 속으로…)

적어도 대화할 때는 말보다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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