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행자
나보다 빨리 결혼해 버릴 줄 몰랐던 내 친구 L을 오랜만에 만났다.
L에게서 간접적으로 듣는 결혼한 여성의 삶은 나랑 별반 차이 없는 것 같다가도 가끔 내가 짐작하기도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L이 나보다 훌쩍 큰 어른같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내가 결코 헤아리기 힘든 것은 시댁이라는 영역인데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때마다 결혼이라는 게 남녀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테면 이번에 시어머님이 생신 때 다 함께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셔서 그 부담이 고스란히 내 친구의 근심이 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한순간에 가족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겠지만 지금 당장 넉넉한 상태가 아닌 L은 완곡하게 시어머님의 의견을 만류하는 와중에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여행이 남는 거야. 경험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나는 그 어머님께
어머님. 그 말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그러니 제 친구를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흔히 여행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와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비포 선라이즈 같은 인연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 탓에 나는 자연히 여행이란 그저 가기만 해도 내 능력치를 골고루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것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여행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것은 아끼지 말자!라는 신조로 20대를 살아왔다. 거기다 내 사주팔자에 들어 있다던 ‘역마살‘이란 것도 한몫을 한 탓일까. 나는 전주, 제주, 경주, 영주, 통영, 대구, 거제, 여수, 순천, 동해, 강릉, 대관령, 안면도, 태안, 인천 등의 국내는 물론이고 필리핀, 일본, 몽골, 아이슬란드도 다녀왔다.
그래서 내가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다른 여행 블로거나 인플루언서처럼 열심히 기록하고 사진도 남기고 순간, 순간의 장면을 기록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어제 있었던 일 마냥 상세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나를 너무 과신했다. 그때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때 찍어서 남겨둔 사진과 영상들은 구도가 어떠했건 내가 못생기게 나왔건 상관없이 값지고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도 한 뼘 늘어났다. 덕분에 내 인생의 방향도 새로운 궤도를 탔다. 180도 까지는 아니지만 45도 정도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몽골에서 시작됐다.
몽골의 하늘은 거짓말처럼 드넓었다. 울란바토르를 벗어나면 금방 커다란 빌딩도 사람도 없는 길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여름보다 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어도 눈앞에 걸리는 것 없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하늘도 땅도 자꾸자꾸 달려 나가는 것처럼 시원했다. 그런 거대한 지평선을 보면 나는 보잘것없이 매우 작은 존재가 되었다. 차로 한참 달려서 만난 가파른 협곡 위에 오르면 그 사이를 노니는 바람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콩나물시루같이 남들과 딱 붙어서 내 부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일상에서 온 나는 한계가 없는 자연 그 자체를 보여준 몽골을 금방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새 몽골의 불편함마저 익숙해져 갈 때,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수세식 화장실이 곳곳마다 마련되어 있고 물 끊길 걱정 없이 온수로 마음껏 몸을 닦는 편리함에 감사하면서도 빽빽하게 솟은 건물을 보며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의식되자 그런 마음은 가실 줄 몰랐다. 그러자 자연히 여행을 다시 떠나고 싶다, 아예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가서 거기서 살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곧잘 했다. 그냥 막연히 이곳만 아니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기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뜩 지친 몸으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버스 안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내 앞에 있던 사람이 휴대폰을 들어 버스 창문 밖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뭘 그렇게 찍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버스가 지나던 한강다리 위로 노을이 지면서 하늘이 분홍, 주홍, 파란색이 섞여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삭막한 서울이었는데 관심을 가지고 다시 바라본 그 풍경은 내가 몽골에서 감탄하며 찍어대던 하늘을 닮아 있었다. 선물 같던 그 장면으로 인해 나는 온통 불만뿐이던 내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하늘 아래,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은 나는 어딜 가도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로 가는 여행보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 자신의 여행에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을 탐험하는 여행자들이다. 지구라는 넓은 행성의 어디에 있든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곳이 몽골이든 부산이든 서울이든, 나를 가장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다. 모두 똑같은 일상에 반복되는 하루일지라도 오늘의 노을은 어제보다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내일의 출근길엔 벚꽃이 피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내일도 마치 여행 가듯 설렐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살아 있는 나를 느낀다면,
살아있음에 두근거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