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될 용기
여자로 태어나서 아기를 가지고 엄마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한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많은 희생과 각오가 필요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것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두고 생각했을 땐, 가능하다면 나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고 그저 막연히 바랐다. 어쩌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 혹은 내 커리어가 누구에게나 인정할 만큼 단단해졌을 때, 또는 언젠가 먼 훗날 나를 닮은 자녀를 너무나도 갖고 싶어 졌을 때, 그때가 온다면 행복하게 임산부 생활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은 얄궂게도 내가 그리던 그림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10개월간의 임산부 판정이 내려진 2024년 7월, 나는 집도 직장도 잃은 백수였다.
친구네 집과 남자친구네 집을 오가며 살다가 겨우 작업실 하나를 얻은 찰나에 알게 된 임신 소식을 나는 선 듯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얄궂은 판정에 억울하다가도
어찌 됐든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자.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노력하면 되지 않겠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가라앉자 결국 모아지는 것은 내 앞의 두 가지 선택지뿐.
그러나 나는 감히 이걸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인지 두려운 마음에 믿을만한 여러 사람들에게 답을 구했다.
나의 공동 책임자, 남자친구는
"우리 어차피 내년에 결혼하기로 양가에 말씀드리기도 했고 난 아기가 좋아서 낳았으면 하지만 너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싶어."
작년에 출산한 동생(친구)은
"언니, 요새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축복이네요, 축복! "
의사 선생님은
"초기에 술 한두 잔 드신 건 괜찮아요. 아기한테는 영향이 없을 테니, 낳을지 말 지는 두 분이 선택하시고 수술하실 거면 다음 주 중으로 병원 오셔야 해요."
혼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장 어렵게 말을 꺼낸 우리 엄마는
"잘 됐네! "라는 반응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마치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할머니가 되는 것을 환영하는 듯했다. (35살 노처녀 딸을 가진 엄마라면 당연한 반응이었을까.)
아무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희생과 노력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통해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큰 기쁨이 될 테고,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도 바랐던 일이 내게 대신 축복처럼 온 것 같을 것이고, 나의 배우자에게는 평생 바랐던 꿈이 되겠지만 나는?
막연히 엄마 되는 경험, 죽기 전에 가능하면 경험해 보는 것이 좋겠지 라던 과거의 나는 얼마나 경솔했던가. 아니면 그때의 나는 거짓말쟁이 었던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어 져서 다음 주 중에만 방문하면 수술이 가능하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그래, 다들 결국엔 내 선택을 존중해 준다고 했으니 임신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도 뭐라고 탓할 사람은 없다. 의사 선생님의 손을 빌어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내가 과연 홀가분하게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이 모든 게 없었던 일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문득 산부인과를 찾았던 날의 기억이 났다. 지역에서 제일 큰 곳이라 어리바리하게 난임센터로 잘 못 들어갔었던 것, 산부인과에 접수를 마치고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구경한 많은 임산부들, 너무 커진 배를 가누기 힘들어 끙끙대며 걸어가는 사람과 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아기랑 손을 잡고 온 사람, 부푼 배를 바라보며 다정한 눈빛으로 대화하는 부부와 그 속의 우리. 마치 낯선 미지의 세상에 내가 덩그러니 놓인 듯한 느낌. 그리고 내 뱃속을 들여다보며 의사 선생님이 해 주셨던 말.
"아기가 잘 자리 잡았네요."
나는 이다지도 위태롭고 나약한 인간인데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잘" 자리 잡았다니.
그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용기를 내야만 했다.
누군가처럼 오랜 기간 고대한 포부나 어떠한 준비도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이 상황에서도
나는 한 발자국 내딛기로 했다.
엄마가 될 용기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