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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ul 12. 2020

나는 물을 좀 더 먹기로 했다

느리지만 강렬하게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인 나는 동네에서 제일 큰 실내수영장을 다니게 된다. 처음 간 날에는 부표를 잡고 발장구치는 연습을 시키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리에 쥐가 난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이 바닥과 딱 붙어 움직일 수 없다. N극과 S극이 맞닿은 자석 같다. 학교에도 겨우 등교한다. 온종일 골골대는 내게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짜릿했던 수영 체험에 대해 떠벌거린다. 그리고 시간대가 몇 번 점프한 뒤, 6개월이 흐른다.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은 강습 선생님의 호위 아래 레인을 따라 자유형을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부표를 꽉 잡고 발장구를 치고 있다. 혼자뿐이다. 나는 부표 없이 물에 떠있을 수 없다. 내가 너무 발전이 없고 물을 무서워하자, 선생님은 나를 열외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첫 물과의 만남은 차갑고 냉혹하고 외로운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안 된다’라는 낙인을 하나 남겨놓고서.


 삼십대에 들어가기 직전에 나는 결혼을 했다. 배우자는 근면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나보다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나보다 많은 도전을 했다. 우리는 어느 더운 여름날, 휴가지로 필리핀 세부를 가기로 했고 떠나기 전에 수영을 한 달 배워 보기로 했다. 강습 전날 밤에 나는 차가운 물이 폐부를 휩싸고 방향 잃은 팔이 바닥을 짚어 대는 꿈을 꿨다. 일어나니 억 소리 나게 어깨가 잔뜩 뭉쳐있었다. 군말 없이 몸을 삐걱대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윽고 우리는 아직 어두워지기 이른 애저녁에 다시 만나 각자의 수영 가방을 챙겼다. 수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달 동안 다닐 수영장은 중학교 옆에 딸린 시 부설 수영장이었다. 낮에는 학생들이 이용하고 새벽과 저녁에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듯했다. 수영장 정문 출입구에 들어가자마자 특유의 물 냄새와 울렁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물걸레 따위를 들고 움직이던 직원들이 맨 발인 채로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인사했다. 시설은 전반적으로 오래되어 보였지만 꼼꼼하게 관리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데스크 직원들이 예의 사무적인 태도로 내민 가입신청서를 군말 없이 써내려간 후에 간단히 회원증에 넣을 사진을 찍었다. 작고 오래 돼 보이는 저화질 카메라는 그 심성이 얼마나 악독한지, 얼굴의 그늘진 부분을 매우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다크써클이 눈 밑에만 있는 게 아니었네. 우리는 서로의 못난 점을 지적하며 웃다가 탈의실 앞에서 헤어졌다. 금세 다시 만난 물 앞에서도 장난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수업시간 전에 이미 수영장 안에 들어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어느새 배우자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물에 뛰어들었다. 나는 외로웠던 어린 날의 수영 강습을 떠올렸다.


 배우자는 수영을 잘하진 못하지만 물속으로 고개를 잘도 처박았다. 그는 부단히 물을 먹었다. 그래도 이 지독한 근면 성실남은 여전히 물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나는 수영장 끝에 걸터앉아 무릎까지만 물에 담그며 발장난을 쳤다. 그러다 그가 튀기는 물을 뒤집어썼다. 내 속도 모르면서!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레인 저편으로 사라졌다. 엉겁결에 먹은 물이 어찌나 독한지 소독약의 쓴맛이 혀뿌리까지 감돌았다. 나는 매워진 눈을 달래느라 연신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는데, 얼굴 근육이 너무 굳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도 ‘안 된다’가 쓰여져 있는 건가. 수경을 쓰고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닥에 닿을 생각으로 잠수할 요령이었다. 곧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물에 안겼다. 물론 얼마 가지도 못하고 수면 위에 떠올라, 코로 또 입으로 푸지게 쓴맛을 봤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여전히 물 속에 있고 배우자를 쉬이 쫓으러 갈 수 있다. 나는 이제 물을 좀 더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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