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사과를 기다리며
아이와 함께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
나 또한 이 모든 일을 온전히 견딜 수 없었기에, 돌봄 센터의 지원을 받아 상담을 병행하며 조금씩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나에게 했던 행동들—
그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를 이해하지 않아도,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책임질 필요도, 보살필 의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저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앞으로도 여러 부수적인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절차대로 대응하면 된다.
더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는 이미 충분히 애썼고, 견뎠고, 살아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널 낳아준 엄마잖아.”
하지만 나는 세상의 잣대에 맞춰 살아가기엔
너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저 ‘평범한 척’ 했을 뿐이다.
지금 이 아이의 문제도, 누군가는 ‘핑계’라 할 수도,
또 누군가는 ‘오지랖’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기준 안에서는 분명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
아이를 돌본다는 것. 그건 옳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아이가
우리 아이처럼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나를 달리게 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사과받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너그럽지도 않다.
나는 그저, 내 아이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사랑을
정당하게 받으며 자라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이 나처럼
“이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는 건 이유가 있을 거야.”
“이 정도 받았으니 나도 뭔가 해야겠지.”
라는 부채감 속에 시달리지 않길 바란다.
잘해주는 사람을 의심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이유를 찾는
그런 뒤틀린 어른이 되지 않길 바란다.
나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내 아이, 내 가족, 내 세상만큼은 바꿀 수 있다.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나는 감사하기로 했다.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것을,
제때 알아챌 수 있었던 그 모든 과정에.
아이가 겪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에.
수많은 판례를 찾아 읽고,
사례들을 공부하고,
아이의 반응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며
치유의 길을 배워갔다.
그리고 이 경험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이 연락을 해 온다면,
용서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다.
분노가 밀려오면 조용히 삼키고,
슬픔이 차오르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마음속 서랍에 고이 접어 넣는다.
그렇게, 나는 '용서할 준비'를 하며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사건은 경찰서에서 검찰로 넘어갔고,
결국 구공판이 결정되었다.
변호인이 있음에도 그렇게 결정되었다는 것은,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정의는 여전히 더디게 오지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사과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