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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남편이 보였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by 유난

현모양처는 아니다.

악처에 가깝다.

내 얘기다.


소크라테스에게 소문난 악처인 크산티페가 있다면 우리 남편에겐 내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 남편은 왜 철학자가 되지 못했나...)

나 스스로 '독사 같은 부인'이라고 말하곤 한다.


공무원을 그만둔다는 건 남편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선뜻 허락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남편이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기에 나는 그만둘 수 있었다. 내가 의원면직 신청공문을 내고 나서 그만둔 지금까지 나에게 왜 그랬냐든지, 좀 참아보지 그랬냐든지 하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고마운 남편이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10년간 살림, 육아,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사실 남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남편은 회사가 멀어서 정상적으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오후 8시. 나는 4시 반 퇴근하는 교행직 공무원이니까 집에 오면 5시~5시 반(발령난 학교마다 조금씩 달랐음). 어쩜 시간도 딱 아이 하원과 저녁식사준비에 최적화되어 있었는지 육아와 살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이를 낳고 1년 반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를 키웠고, 복직을 하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행정실에선 한창 일이 많을 7급 시절이었다. 학교에 남아 야근을 하기도 어려울 때라 일이 끝나면 서류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아이를 돌보다가 재우고나서야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육아에 있어서도 너무 어려운 시기였다. 3살부터 8살까지. 아이 하나 키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동동거려야 하는데 둘셋씩 키우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집안꼴은 또 얼마나 엉망인지. 내 집이지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퇴근도 늦고, 살림이나 육아에 대해선 젬병인 남편이 싫고 볼 때마다 화가 났다.


나도 일하는데 왜 나는 살림도 육아도 도맡아 해야 하는 거야?

분노조절장애가 생긴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났다. 남편이 꼴 보기도 싫고 남편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특별히 부부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남편이 너무 미워서 그만 살고 싶은 때도 있었다.


그때가 아이 3살~5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부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남편이 케어를 잘 못해주니 그 몫을 내가 더 해야 해서 그때가 내게는 너무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신기하게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서서히 1인분의 몫을 해나가기 시작하면서 나의 어깨도 조금 가벼워지고 남편에 대한 미움도 조금씩 측은지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늙어가는 남편의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짠해지기 시작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남편보다는 내가 훨씬 더 살림과 육아에 헌신하고 있고, 직장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기에 항상 억울했고 손해 보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여보, 요즘 우리 회사에서 이런저런 어이없는 일이 있어서.. 우리 부서가 어쩌고저쩌고..."

"스탑. 사무실 얘기는 회사 사람들이랑 하면 안 돼? 나 별로 듣고 싶지가 않아."

"안 듣고 싶다고?"(서운한 기색 역력)

"응. 문제없는 회사 없고,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나도 지금 죽지 못해 다니고 있는 중이야."


내가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었다.

퇴근해서 정신없이 아이 씻기고 놀아주고 밥해먹이고 치우고 재우고 겨우 육퇴해서 TV앞에 앉았는데.. 이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며 드라마 보려는데 남편이 옆에 앉아서 회사 어쩌고 얘기 꺼내기 시작하면 듣기 싫어서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당신은 회사일만 신경 쓰면 되지 않냐고.


사기업 부장님인 남편은 공무원인 내가 있어서 보험에 든 것처럼 회사생활이 덜 불안하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그 보험은 해지되었고, 이제 그는 외벌이가 되었고 몇년뒤 50을 앞두고 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이제야 남편이 보인다.

지난 10년간 남편도 많이 힘들고 외로웠겠구나.

내가 내 새끼 이쁘다고 밤마다 아이만 끌어안고 부둥부둥하는 동안, 육아도 직장도 힘들어죽겠다고 앓는 소리 해대는 동안, 그만두고 싶다고 징징거리고 우울의 늪에 가라앉아 울며 지낸 동안 남편은 변함없이 왕복 3시간반의 출퇴근을 묵묵히 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보였다.


일을 그만둔 후, 퇴근하고 온 남편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집안일을 내가 전담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리 늦게 퇴근하고 왔어도 설거지하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이제는 내가 남편 퇴근 전에 집안일을 거의 다 해놓는다. 가끔 남편이 출출하다고 하면 야식도 챙겨준다.

(그전에는 저녁식사 끝나면 주방 셔터 내림)


요즘 내가 웬만한 집안일들을 미리 다 해치우니 남편이 퇴근 후에 할 게 없단다.

"청소랑 설거지 같은 거 너무 무리해서 안 해도 돼."

"(머리 조아리며) 아니 여보,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제가 이렇게 호의호식하는데 여보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드려야죠."

"(어이없어한다.) 여보는 나 놀리는 게 재밌어?"

"어. 꿀잼. 그리고 하나도 안 힘들어. 여보가 회사 다니느라 힘들지."


살림과 육아가 절대로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직장과 병행해 동동거리며 하다가 직장을 내려놓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살림도 나름 할만하다. 육아는... 음... 계속 계속 새로운 퀘스트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역시 쉽진 않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조만간 구조조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남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니 많이 미안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의원면직 못할 뻔했네. 너무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처진 어깨로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철없는 아내가 이야기했다.

"혹시 여보 회사에서 짤리면 출근하는 척 연기하지 말고 우리 더 늙기 전에 외국 나가서 한 달 살기 해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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