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내가 서른이 되어서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빈도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본가에서 아빠는 술을 먹을 때마다 내게 밤이든 새벽이든 전화를 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 시간쯤 되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두 달전쯤 아무 생각 없이 받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분명 술을 먹고 또다시 전화하면 아빠 없이 살겠다고 했건만 술에 잔뜩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내게 이런저런 소리를 하셨다. 그러다 아빠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나는 더 이상 아빠 있는 삶을 살지 않기로 했다.
그날 나는 당장 아빠의 카톡과 전화번호를 차단해버렸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엄마에게도 나는 이제 아빠가 없으니 번호도 다 차단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 며칠 전, 설 연휴가 되었으나 나는 대전에 내려가지 않았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덕담을 하시다가 옆에 아빠가 있으니 바꿔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바쁘단 핑계로 조금 있다 걸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쯤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아빠에게 전화 한 통 하라는. 나는 싫다고, 나는 아빠가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빠가 서운해하니 그냥 간단히 말하고 끊으라 했다. 나는 여전히 싫다고 했다.
K-장녀는 참 외롭다. 어렸을 때부터 툭하면 사랑의 매를 맞던 나와는 달리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여동생은 혼나지 않았고, 고등학교 시절 교정이 필요하다는 얘기조차 무시당했으나 결국 나중에 동생 먼저 교정을 시작했다. 그때 돈을 벌던 나는 사회초년생의 푼돈으로 교정을 시작했다. 돈이 없다며 내게 소비의 무서움을 알려주셨지만, 그 당시 중학생인 여동생에게는 5만 원짜리 백화점 후드티를 아무렇지 않게 사주셨다.
몇 년 전,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고 체크카드로 살아가던 내게 신용카드를 만들 생각이 없냐고 계속 물으셨다. 집요하게 묻는 것이 이상해 이유를 물으니, 동생이 과제를 하는데 230만 원짜리 컴퓨터가 필요해 할부로 사주려 한다는 이유였다. 내가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할부로 결제하면 달마다 얼마씩 넣어주신다는 소리였다. 나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답답했다.
언제나 답답해하며 울면서 소리치는 내게 돌아오는 답은 '네가 큰 딸이니 이해해라'였다. 동생은 억지를 부려도 되고 고집을 부려도 된다. 그러나 장녀인 나는 안된다. 언제나 나는 이해하고 집을 위해서 희생이 요구되었다. 내겐 아직 부모님의 대출금도 남았고, 부모님께 받아야 할 돈이 2500만 원을 넘어섰다. 무조건 갚겠다 하셨지만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물론 모든 장녀들이 희생과 이해를 요구받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장녀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희생과 이해를 요구받고 자란다. '집에 돈이 없어', '네가 큰 딸이니 이해해야지', '동생은 아직 어리잖니', '엄마 아빠는 너만 보고 산다' 등의 주입식 교육과 함께 자연스레 나의 것을 내놓게 된다. 나중에 가서 싫다고 소리쳐봐야 불효녀 소리만 듣는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여전히 상처받는 서른 살 K-장녀는 오늘도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