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SNS 계정을 보던 나는 문득 언니가 한국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언니가 몇 년 전부터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무기한 연장되었던 탓에 이대로 못 가겠거니 생각했었다. 놀란 마음에 당장 언니에게 독일로 갔는지 물었다.
"아니, 이로야. 사실 나는 지금 호주에 있어. 1년 살러왔어, 어제."
말도 없이 떠난 부분이 내심 속상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언니는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가줬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그냥 말도 없이 떠나고 싶었다며 미안하다고. 그 말이 나는 너무나도 와닿아서 속상함도 잊었다. 결국 다음 날, B와 밥을 먹다 말고 나는 울어버렸다.
언니는 내게 다가가기 쉬운 멘토였다. 여성미에 얽매이지 않으며, 연애와 외로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길고 넓게 볼 줄 알며, 단점보다도 장점을 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주어진 것에 자만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남이 가진 것을 깔아뭉개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20대 중반의 나이에도 힘들어하는 내게 편지를 건네주곤 했었다. 생일이면 어떻게든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아주는 사람이었고, 선물은 늘 내게 어울리는 것, 필요한 것,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 등 나를 오래 보고 자세히 알아야지만 선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언니가 이 시기에 더욱 지체하기 않고 떠나간 이유를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더 늦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선택은 이제 인생을 크게 뒤바꿀 수도 있는 나이며, 어떠한 만남과 관계를 가지는지 혹은 어떠한 경험을 할 것이며 어떤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자신이 하고자 함을 이루어내려 한국을 떠났다.
언니가 하는 말과 행동들은 항상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하고자 했지만 겨우 조금씩 안정화된 나의 삶에 무던해진 나는 어느 순간 그것들을 잊고 살았다. 글을 쓰고, 그것들을 거르고 모아 책을 내고 싶었고, 나처럼 아름답지 못했던 사랑을 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마우스 대신 마이크를 잡고 싶었고, 타자 대신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이제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몇 년씩이나 마음속에 품고 과감하게 도려내지도 못할 꿈이라면 그래도 낮잠 안에 단꿈이라도 꿔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 나는 글감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